경상도 말모이의 이유
경상남도 동남권 소도시에서 반백년 가까이 살다가 충청권으로 이사 온 건 이년 전 즈음이었다. 어떤 사람에게 외부 환경이 바뀐다는 것은 삶이라는 무대에서 긴장과 자극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것이 비록 같은 나라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라도 말이다. 외부에서 시작된 환경의 변화가 주는 내부의 긴장과 자극에 '말'은 예상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나는 이사 오고 한 달쯤 지났을 때부터 깨닫게 되었다.
도서관에 오며 가며 안면을 익힌 동생이 한 명 있었다. 열굴도 예쁘장하고 솜씨가 좋은 사람이었다. 늘 단정하게 어깨가지 오는 단발을 하고 다닌 동생이 어느 여름날 머리를 묶고 왔었다. 그것 또한 깔끔하고 예뻤다. 나는 말했다. "00 씨, 오늘 머리 참 참하게 짜맸네요."
00씨는 내 말을 못 알아듣고 "네? 뭐라고 하셨어요?"라며 반문했는데 나는 내 목소리가 작았나, 하며 더 크게 말했다. "머리 참하게 짜매고 왔다고." 더 또렷하게 말하는 나를 보고 00씨는 "짜매가 뭐예요?"라고 물었다. 나는 00씨의 질문에 크게 당황했는데 '짜매다'는 말을 모를 거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 오늘 머리 단정하게 묶고 왔다고요."라고 풀이를 해주는 내게 00 씨는 "아, 짜매가 묶는다는 말이에요? 처음 들어봐요"라고 했다. 처음 듣는 말에 00씨도 놀랐겠지만 그 말을 모른다는 거에 나 또한 의외였다.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도서관 모임에서 만난 사람 중에 부산 사람 A가 있었다. 나랑 A랑이랑 서울 사람 B 세 명이서 대화를 하던 중이었다. A가 말했다. "어제 신랑이랑 말다툼이 있었는데 신랑이 나한테 말을 어찌나 매~ 하던지 기분이 확 나쁜 거예요. 지도 별 잘난 것도 없으면서." A의 말에 나는 이렇게 화답했다. "A가 이해해요. 원래 남자들이 감정 생각 안 하고 논리적으로 매~매~ 말한다 아입니까?" A와 나는 그렇긴 하죠, 하며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우리 이야기를 듣던 B가 물었다. "매~ 말하는 게 뭐예요?" A와 나는 순간 당황했는데 "매~"라는 말을 다른 사람이 모를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를 이렇게 설명했다. '야박하게, 따지듯이, 논리적이지만 감정 상하게' 말을 하는 품새라고. 하지만 B는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매~"의 뉘앙스를 제대로 이해한 것 같지는 않았다.
이사 초기 이런 일을 몇 번 겪고 나니 말할 때마다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원래 내가 하던 말투대로 말을 하니 내 말을 단박에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말을 할 때 표준말과 표준 억양으로 바꾸어 말하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니 말이, 대화가 편하지 않게 되었고 사람 만나는 게 때로는 피곤하기까지 하였다. 나는 생각했다.
"서울말을 쓰는 것이 다른 지역 사람에겐 제2외국어랑 매 한가지구나. 한국말하는데 이렇게 억양을 이렇게 신경 써야 하다니!"
나는 '모국어'를 그리워했고 속 시원한 소통을 하게 되는 때를 그리워했다. 그때란, 고향 방문이나 사투리로 된 문학을 접할 때였다. 굳이 생각하며 말하느라 머리를 쓸 필요가 없으니까.
코로나 때문에 자주는 아니었지만 1년에 두 번은 고향엘 갔었다. 오랜만에 엄마, 언니, 오빠를 만나면 참 반갑다. 나이 든 가족이 으레 그러하듯 우리도 모이면 옛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대화가 길어지고 깊어질수록 고향에서만 살아온 친정식구들의 본연의 말투가 나온다.
저녁 먹으려고 소고깃국으로 끓였다. 언니가 국을 그릇을 담으려고 하자 엄마가 옆에서 말했다. "퍼 가지 말고 냄비째양 갖다 놓고 지줌 꺼 지가 알아서 퍼묵으라 캐라.(퍼 가지 말고 냄비 채 갖다 놓고 자기 꺼는 자기가 각자 알아서 퍼 먹으라고 해)" 언니는 알았다고 하며 냄비 통째로 방으로 들고 갔다.
'지줌'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었다. 뭐 수도권으로 이사 간 지 얼마나 됐다고 엄마가 자주 쓰던 사투리들을 고새 잊고 있었다. 엄마랑 같이 살 때나 자주 친정에 들를 때는 늘상 듣던 단어들이라 하나도 신기하지 않았는데 내가 고향과 멀리 살다 보니 작은 사투리 단어 하나하나에도 반응을 하게 되었다.
사실 우리 엄마는 팔십이 넘은 나이에다가 다른 지역에는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고 고등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엄마가 어릴 때 쓰던 말들을 아직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나 언니도 엄마가 쓰던 단어나 어투를 많이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아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고향을 떠났다고 해서 나는 그새 엄마의 말투와 어법을 잊어가기 시작한 것 같았다. 가족과 대화 중에 이런 생각이 들자 뭔가 가슴 한쪽이 허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엄마가 쓰는 말, 내가 썼던 말을 수집해야겠다고 그때 생각을 했다. 아마 엄마가 돌아가시면 엄마가 쓰던 말도 사라질지도 모른다, 내가 알던 말도 자주 듣고 쓰지 않으니 시간이 지나면 내 기억 속에서도 잊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라지기 전에, 잊히기 전에 나는 떠오르는 대로 고향 사투리를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사투리 에세이를 쓰기 시작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시작은 열 개 남짓한 사투리뿐이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백 여개 정도의 사투리가 남아 있다. 즉, 쓸거리가 '천지삐까리'만큼 남아있다는 것이다. 틈틈이 경상도 사투리, 내 모국어, 고향 말을 남겨놓으려 한다. 사투리, 모국어, 고향 말을 남기는 것은 단순히 말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내 유년시절을 복기하는 것이고 내 추억을 되새기는 것이며 그 시절의 행복한 순간을 다시 한번
만끽하는 것이다. 내 머릿속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이 일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