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사투리 에세이
우리 집은 동네 사랑방이었다. 21평짜리 언덕 밑에 푹 꺼진 하얀 집인 우리 집은 마당발이자 오지라퍼인 엄마 덕분에 늘 동네 아줌마들이 모여 수다를 떠는 맘 카페 역할을 도맡아 하였다. 훈이 엄마, 소영이 엄마는 고정 멤버였고 선미네 정숙이네 기덕이네도 자주 오는 멤버였다. 화단을 끼고 있는 테라스와 바로 맞닿아 있는 거실 창문은 방충망만 닫히고 문은 늘 열어둔 채 동네 아줌마들의 수다로 시끌벅적했다. 그때 우리 집에는 대문이 필요 없었다.
남편들을 출근시키고 아이들을 등교시킨 아줌마들 은 각자 살림 거리를 한 가지 두 가지씩 들고 우리 집엘 왔다. 멸치를 들고 와서 멸치 똥을 따는 아줌마도 있었고 장날 가득 사 둔 마늘을 차곡차곡 까는 아줌마도 있었다. 바느질감이나 뜨개질 감을 들고 와서 손을 재게 놀리는 아줌마도 있었다. 이런저런 일거리가 없으면 빈손으로 와서 서로의 일감을 나누기도 하였다.
일을 하다 손이 지치거나 손목이 힘들 때면 아줌마들은 엄마의 진두지휘 아래 고스톱을 쳤다. 어찌 보면 엄마는 언덕 밑 그 동네에 점 십 원짜리 고스톱을 전파시킨 도박 전파범일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잔잔한 동네에 엄마가 등장해서 살림에 팍팍해진 아줌마들에게 소소한 재미를 안겨주었고 그 맛에 아줌마들은 아이들 학교 가듯이 우리 집에 오곤 했던 것이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갔을 때 우리 집에 대여섯 명의 아줌마들이 모여서 하하 호호 새실까는 모습을 보게 될 때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집에 갔을 때 나를 반기는 건, 나를 보고 짖어대는 맥스의 컹컹거리는 소리와 부엌 한구석에 보자기로 덮인 찐 감자 그릇과 카세트테이프 한 개가 들어가는 작은 라디오면 충분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엉덩이가 내 두 배 만한 아줌마들이 우리 집 거실을 다 차지하고 있을 땐 정말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엄마 생신이 며칠 지나지 않은 5월의 어느 날이었다. 녹색 양철 대문을 '쩡'하고 열자마다 '하하 하하' '호호호호' 크게 웃는 웃음소리가 집 밖으로 새어 나왔다.
"아씨, 아줌마들 또 왔네. 오늘은 가방만 던져두고 만화방에나 가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하며 현관문을 열었는데 거실 한가운데 잔뜩 돼지 수육이 놓여 있고 빨갛게 맛있게 버무려진 김치도 같이 놓여 있었다.
"어, 00이 왔나? 여 와서 돼지 괴기 무그라. 억수로 맛있게 쌈기따."
우리 집에 제일 자주 와서 나랑 안면이 가장 많이 튼 소영이 엄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가방을 두고 만화방으로 가고 싶었으나 기름기가 좌르르 흐르는 돼지고기 수육을 보는 순간, 만화보다 고기였다. 우리 집은 고기를 먹는 날이 장날 아니고는 흔치 않았기 때문에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홀림이었다. "아, 예. 이거 웬 겁니꺼? 맛있겠네예."
나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부엌에서 젓가락을 챙겨왔다.
"얼마 전에 너거 엄마 생일이었다미? 그래가 이 형님이 축하한다꼬 괴기를 이리 안 사왔나? 이 형님은 고기를 내고 내가 된장 하고 뭐 이것저것 넣고 삶았다 아이가! 이 보쌈김치는 또 저 형님이 집에서 안 가왔나. 동네 솜씨쟁이들이 모이끼네 한상 거나하게 차리짓네. 여 앉아가 수육 한 모타리 무그라"
"한 모타리 뿌이가? 두 모타리 세 모타리 묵어도 된다. 한창 클낀데 마이 무야지"
"맞다! 맞다!"
싫은 마음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내놓고 나는 재게 젓가락을 놀렸다. 부들부들한 수육은 정말 맛있었다. 김치는 또 어찌 그리 상큼한지. 고기 세 점에 김치를 한 장 턱 걸치고 입안에 가득 넣고 두 볼이 미어터지게 씹었다. 아이고, 가시나 참 맛나게도 묵는다. 나중에 잘 살겠다.라는 둥의 덕담이 수육 너머로 오고 갔다.
"00야, 니 점방에 가가 탁배기 한 두어 병 받아 온다. 이리 모도들 괴기도 내고 김치도 냈는데 술은 내가 내야 한 되겠나?" 엄마가 지갑에서 오 천 원짜리 지폐를 꺼내면서 나에게 말하였다.
"아이고, 형님. 탁배기 살라꼬? 그라믄 우리는 좋지. 그란데 탁배기 한 사발씩 묵고 취해가 오늘 밤 이 집에 눌러 앉아뿌믄 우야지? 아이씨가 막 고함치믄서 우리 쪼까낼낀데"
"이 샴들이, 낮부터 술을 뭐 얼매나 묵을라꼬! 00아, 요 밑에 가서 탁배기 세 병만 사 온나. 한 사람이 두 사발씩만 마시믄 되지 뭐" 엄마가 준 오 천 원을 들고 현관을 나서는데 아줌마들이 한 입 두 입씩 보탰다.
"우리 행님, 와 이리 통이 작노? 이왕 기마이 쓰는 거 좀 팍팍 더 쓰지 탁배기 세 병이 뭔교?"
"그래 괴기 있는데 술이 빠지믄 안 되지. 어여 댕기 온나"
"00야, 패내이 댕기온내이"
"패니이는 뭔 패내이! 괴기 떨어지기 전에 퍼뜩퍼뜩 댕기 와야지"
나는 돈 오 천 원을 들고 신발을 신으면서 쏟아지는 말들에 화답했다.
"아지매들, 내 패내이 댕기 오께요. 수육 천천히 잡숴야 됩니더. 알았지예?"
나는 잰 걸음으로 점방으로 향해 갔다. 수육과 아마도 탁배기를 사고 남을 잔돈을 가질 희망에 그날의 심부름은 기분 좋은 심부름이었다.
-새실까다: 새실은 '사설'의 경상도 사투리. 새실까다는 사설을 늘어놓다, 수다를 떨다는 뜻이다.
-모타리: 덩이 혹은 토막의 뜻을 가진 경상도 사투리. 맥락에 따라 큰 덩어리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작은 한두 토막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탁배기: 막걸리의 경상도 사투리
-기마이: 돈이나 물건을 선선히 내놓는 것을 말하는 경상도 사투리. 선심 쓴다는 의미
-패내이: '조심해서 빨리 와'라는 의미를 가진 경상도 사투리. 퍼뜩퍼뜩보다는 느리지만 천천히는 절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