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죄송한데요, 제가 지갑을 안 들고 나와서요, 카드도 없고 현금도 없어서 그런데 현금 있으시면 오천 원이나 만원만 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제가 지금 바로 계좌로 쏴드릴게요!"
오늘 아침 지하철역에서 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인상 좋아 보이는 20대 학생같이 보이는 여자에게 마치 형장에 끌려온 죄인같이 비굴한 자세로 이렇게 말했다.
"현금이 없는데요"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하는 대답이었다. 한 칸 건너 옆에 20대 청년이 앉아있었다. 내가 하는 꼴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 사정을 짐작하겠지, 하고 급한 마음에 청년에게 똑같이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 청년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았다. 눈에서 레이저빔이 나오는 줄 알았다. 섭섭한 마음과 야속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나는 고개만 살짝 숙이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집까지 뛰어갔다 와야겠다는 생각으로 급히 지하철을 되돌아 나오다 나는 뛰던 발걸음을 멈췄다. 집까지 왕복 30분, 그러면 도저히 약속시간을 맞출 수 없다. 개인 약속이 아니라 현장수업을 온 학생들과의 약속이라 꼭 지켜야만 했다.
나는 다시 되돌아가 STORYWAY 편의점에 들어갔다. 계산대에는 내 나이또래의 아주머니가 있었다. 나는 또 같은 대사를 아주 절박하게 흐느꼈다. 정말 거의 흐느꼈다.
"우리는 계좌번호가 없어서..."
나는 이 말을 듣고서야 아까 그 청년의 따가운 눈초리가 이해가 되었다. 요새 계좌번호만 알면 일방적으로 돈을 보내고 문제해결을 위해 계좌를 정지당하고 부당하게 돈을 송금하는 사고가 있었다던데, 나를 그런 사람으로 인식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맘이 급하다 보니 또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 어서 경복궁으로 가야 했다.
나는 역무원실로 갔다. 역무원실에서 이런저런 사정을 이야기하니, 경복궁역은 4호선과 회사가 달라서 들여보내줄 수는 있는데, 똑같은 설명을 거기서도 똑같이 해야 한다고 했다. 경복궁역에서 설명하느라 시간을 지체하느니 여기서 해결하는 게 나아 보였다.
역무원으로 말고 개인적으로 돈을 좀 빌려줄 수 없겠냐고 염치 불고하고 부탁을 했는데, 난처해하는 역무원들의 얼굴만 확인할 뿐이었다.
공무원도 나를 못 도와주는데, 진짜 집까지 갔다 와야 하나? 돈 오천 원 때문에 사람이 이렇게 비굴해지다니!
땅까지 내려간 것 같은 어깨를 하고 역무원실을 나왔다. 집까지 갈 요량을 하고 불안한 눈동자와 휘청거리는 다리를 부여잡았다.
그때였다. 아까 STORYWAY 직원분이 살며시 오더니 "저기, 손님"하고 나를 불렀다. 그분이 보기에 내가 너무 안 돼 보였 나보다. 그리고 아마 돈 오천 원 적선하는 셈 치자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빳빳한 오천 원권 한 장을 주면서 계좌번호는 없으니, 내일 아침 같은 시간에 와서 갚으라고 했다. 너무 기뻤다. 약속시간에 늦지 않을 수 있었다. 편의점 직원분의 용기 있는 호의가 너무도 감사했다. 나는 이름과 연락처를 남기고 내일 아침 같은 시간에 꼭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무사히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에서 오늘 아침의 사태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내 모습을 한번 보았다.
단발 파마머리, 10년쯤 된 국방색 빈티지 가을코트, 오래되어 해진 쥐색 청바지에 낡은 리복운동화(청년은 리복을 알까?)
내가 패션에 관심이 있어서 비싸 보이고 이쁜 트렌디한 옷을 입고 있었더라도 그 청년이 그렇게 싸늘한 눈길을 보냈을까? 그랬다면 진짜 실수로 지갑을 안 갖고 나온 돈 많은 아줌마로 보고 현금을 빌려주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갑을 안 챙긴 내 부주의함에 탄식이 나고, 현금 오천 원도 못 빌리는 내 매력 없음에 서글퍼지고, 점차 각박해지는 세상에 못내 아쉬움이 드는 오늘 아침이었다.
(남편 연말정산을 위해서 남편 카드른 위주로 써서 내 카드를 거의 쓰지 않았는데 이따 집에 가서 내 카드 하나쯤은 삼성페이로 폰에 당장 탑재해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