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함께 한 제주도 여행
우리 엄마는 2024년에 한국식 세는 나이로 86세가 되었다. 나이는 숫자 하나가 늘었을 뿐이지만, 몸의 기력은 과히 기하급수적으로 쇠퇴하고 있다. 엄마의 육체가 급격히 노쇠하게 된 것은 엄마 나이 80이 넘어서부터였던 것 같다. 흔히 세상을 오래 산 노인들이,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바뀌면 몸의 기력이 일년 이년 다르고, 한 달 두 달 다르고 어제오늘이 다르다고 하는데, 엄마는 80이 넘어가면서 당신의 기력이 아침저녁이 다르다고 했다.
얼마 전 한 친구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친정엄마랑 언니들이랑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엄마의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왜 이런 기회를 더 많이 가지지 못했을까, 안타까웠다고 하며 자리를 같이 했던 나를 포함한 친구들에게 엄마랑 여행을 다녀오라고 권유하였다.
지난 설에 온 친정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 오빠와 언니들에게 이야기했다. 엄마 모시고, 우리 남매 1박 2일이라도 여행 어떠냐고. 내 말을 들은 오빠와 언니는 이구동성으로 반대를 외쳤다. 엄마는 반나절도 여행을 갈한 만 체력이 안된다고 했다. 여행을 출발하자마자, 엄마에게는 고행, 우리에게는 고문이 될 거라고 장담했다.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니, 10년 전 제주도 고사리 투어 기억 안 나나?"
오빠의 이 한마디에 나는 푸흡하며 웃을 수밖에 없었고, 엄마와의 여행은 가까운 맛집이나 가는 것으로 만족해야 함을 알았다.
때는 2012년 어버이날을 앞둔 5월이었다. 엄마가 아직은 70대였을 때였다. 하지만 그때도 엄마는 장거리 긴 여행을 하기에는 충분한 몸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엄마가 더 나이가 들어 여행을 못 하기 전에 다 같이 가족 여행을 가기로 했다. 장소는 당연하게도 제주도로 낙점되었다. 다 같이 비행기는 한번 타보자는 것이었다. 직장에서 휴가를 얻기가 어려운 사람도 있어서 금, 토, 일의 2박 3일 여행을 계획했다. 따라오기 싫어하는 아이들은 학업을 핑계로 합류하지 않았고, 엄마와 사 남매 그리고 사 남매의 배우자 이렇게 9명이 처음으로 다 같이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항공권부터 숙소 여행장소까지의 계획은 내가 담당하게 되었다. 나는 사전에 모두들에게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을 물어보았다. 식구들은 가족 다 같이 여행을 가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크니 나머지는 다 알아서 하라고 했다. 실은 알아서 하라는 것이 제일 부담이긴 했지만, 나는 오케이 접수를 하였다.
자신을 데리고 자식들이 여행을 간다고 하니 내심 기분이 무지 좋았던 엄마는 "마할라꼬 여행을 간다꼬 그래쌓노? 돈도 많이 들낀데. 너거들 돈 있나? 백지 너거들 고생하는 거 아이가? 마 다 같이 가찹은 데서 밥이나 한끼 무믄 될낀데."라며, 한국 부모님 특유의 희망사항을 에둘러 거절하는 기법을 시전 하였다.
그러면서 나지막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주도는 고사리가 그리 좋은 갑대! 아랫집 할마씨가 자식들하고 제주도 여행 갔다 와서 고사리를 가와가 한봉다리석 노놔 주던데 참 여리고 꼬시더라. 그 할마씨는 고사리를 오데서 직접 끊었다카든데, 시간이 되거든 우리도 고사리 좋은 데 가서 고사리 좀 끊어오자, 잉?"
제주도의 첫날은 도착 후 저녁식사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본격적 관광은 다음날인 토요일부터였다. 취침 전에 내일 일정을 간단히 브리핑하는데 자는 듯 보였던 엄마가 몸을 돌리며 질문을 하였다.
"고사리 끊으려는 언제 가노?"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인 오빠가 일정표를 다시 꼼꼼히 보더니 말했다.
"가만 보자~ 여 큰사슴오름 이런 데 고사리 안 없겠나? 내일 오전에 여서 고사리 함 찾아보자. 엄마요, 우리 내일 고사리 캐러 감더."
"아, 글나? 아이코야 우짜꼬? 고사리 넣을 쪼마이를 안가왔네."
고사리를 가득 캐서 넣을 가방을 안 가져와서 심히 안타까운 엄마를 보고 우리는 다 같이 크게 웃었다.
오전 두 번째 코스가 큰사슴오름이었다. 입구 어드메 차를 대고 오름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야들아, 이거 고사리다 고사리. 잠깐 서 봐라."
걸음이 힘들어서 제일 늦게 뒤쳐진 엄마와 함께 가던 오빠의 손을 부여잡으며 엄마가 큰소리로 우리를 불렀다. 엄마가 드디어 제주도 고사리를 발견한 것이다. 엄마는 오름은 상관없고 고사리나 캐자며 땅에 주저 않았고 갖고 왔던 과도를 꺼내 고사를 캐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 마디씩 하며 엄마를 말렸다.
"엄마요, 칼로 뿌리째 캐믄 안 됨더. 캔다 해도 뿌리 놔두고 끝에만 끊어야지요."
"엄마, 여서 퍼질러 있으믄 오름은 언제 올라갔다 오노? 갔다 오는 길에 캐자."
"내가 고사리 사 주께. 시장이나 마트 가면 더 좋은 거 손질 다 해가 판다."
"어무이, 제주도까지 와서 구경해야지요? 와 이람미꺼?"
"엄마, 일카믄 엄마 놔두고 우리꺼정 올라간대이~"
자식들의 성화에 "에잇! 문디같은 것들!"하며 마지못해 오름을 올라간 엄마는 그러나 내려오는 길에 다시 고사리가 있던 그 자리에 퍼질러 앉고 말았다. 자식들이 온갖 회유와, 협박(?)과 단호함을 보였음에도 한국 부모가 가진 힘, '효' 스킬과 한국 자식들의 약한 고리인 '불효'의 파워 앞에 엄마는 승리하였다.
"난 몰라. 차에 가 있을란다. 다 하고 오소."
딸과 사위, 며느리는 엄마의 고사리 채집을 기다리다 지쳐 차로 돌아갔건만, 효자 큰 아들은 끝까지 엄마 옆에 있다가 엄마를 설득/겁박/애원하여 마침내 고사리 채집을 끝냈다.
오후에 성산일출봉을 갔다가 쇠소깍으로 가는 길에서도 푸르른 들판만 보이면 엄마는 "여 고사리 많아 보인다. 여 함 서봐라~"라는 말을 랩 라임하듯 읊었다. 빠듯한 관광 일정에 내처 달리자 급기야 엄마는 토라진 듯 했다.
"내는 다른 거 안 볼꺼다. 내는 여 벌판에 떨짜 주고 너거끼리 구경 갔다 온나. 한두 시간 있다가 내 데리러 오믄 된다 아이가!"
질풍노도의 청소년처럼 반항하는 엄마를 위해 할 수 없이 어느 이름도 모를 곳에 차를 댔다. 그곳은 윈도 화면에 나올법한 하늘색과 들판의 색을 갖고 있는 과히 풍경은 멋진 곳이었다. 어떤 작물을 하던 밭이었는지, 서울의 땅주인이 투기로 사둔 땅을 그냥 놀리고 있었던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푸른 허허 들판에 9명의 어른들은 고사리를 캐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이게 고사리 맞나?"
"이거는 너무 늙어서 못 묵는다. 내삐리라. 니는 묵는 고사리, 늙은 고사리도 모리나? 세상 헛살았구먼."
"고사리가 별로 없네? 허리만 아프고 시간만 간다. 고마 가자."
"어휴, 난 안할란다. 제주도 와서 이게 뭐꼬?"
"아이고, 허리야. 우리가 놀러 왔나, 놉하러 왔나."
"다음부턴 엄마 니캉 놀러 못 다니겠다."
푸른 허허 들판에서 고사리를 캐는지, 수다를 떠는지, 단합대회를 하는지 모를 두 시간이었다. 가까이서는 아옹다옹, 우당탕탕 시끄러운 가족이었지만 아마 멀리서 보면 '밀레의 만종'의 재현이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평소에는 온갖 데 안 아픈 데가 없는 제일 연로한 노인네는 어찌 된 영문인지 짱짱했다. 반면, 4~50대의 중년의 자식들의 입에서는 '아이고 허리야' 혹은 '에구구구 무릎이야'와 같은 고통의 외마디가 새어 나왔다. 두 시간 가까이 있었지만, 원래 고사리가 나는 곳이 아닌 마냥 허허 들판인지라 수확량은 성에 차지 않았다. 육체의 고통에 패배한 자식들의 손에 이끌려 엄마는 전혀 만족하지 못한 수확량을 들고 그곳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날 저녁 잠자리에 들 때까지 엄마는 고사리가 눈에 아른거렸다고 한다.
마지막날 아침 식사를 하고 비행기를 탈 때까지 원래 우리는 미로공원과 용머리해안가를 가기로 되어있었다.
공항 방면으로 가는 내내 엄마는 침울해 보였다. 왜 그러냐고 누군가 물었다. 엄마가 말했다.
"아랫집 할마씨 말이, 제주도에는 고사리 끊을 때가 천지삐까리라 하든데, 와 없을꼬? 내는 제주도 고사리 끊어갈 생각에 억수로 기분이 좋았는데 고사리도 별로 없고, 있는 것도 너무 늙어뿟고."
심드렁한 엄마의 말과 표정에 마음이 약해진 아들과 사위는 "장모님, 고사리 한번 더 찾아보입시더. 우리가 뭐 미로를 보믄 뭐할끼고, 용머리 돌띠를 보믄 뭐할낀교? 장모님 기분 좋은 게 제일이지. 그지요?"
그렇게 우리는 제주도의 마지막 날에도 고사리를 찾아 길을 헤매었고, 고사리가 있을 법한 곳에 내려서 또 한 번의 '밀레의 만종'을 재현했다. 고사리 수확량은 비루했지만, 마지막까지 고사리를 찾아서 미련을 떨칠 수 있었던 엄마는 얼마간의 미소를 되찾았다.
집에 도착해서 캐온 고사리를 다 풀어보았다. 제주도에 있을 때는 조금이라도 싱싱해 보였던 고사리는 비행기 안에서 태양에 녹았던지 시들시들해졌다. 나 같이 고사리 감별을 잘 못하는 사람 몇몇이 캐온 것은 과감히 버려졌다. 그러고 나니 엄마 손에 남은 고사리는 대여섯 시간의 시간을 무려 9명의 장정이 시간을 허비한 것에 비하면 너무도 쓸쓸하였다. 시장에서 사면 오천 원 정도밖에 안 할 정도의 양이었다.
아마 엄마는 아랫집 할마씨한테 '봐라, 나도 우리 애들하고 제주도 갔다 왔다. 니만치 고사리도 캤다. 봐라 봐~!"라고 의기양양하게 자랑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 고사리인지, 가족여행인지, 잘 커준 자식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제주도에서는 시끌벅적 고함 소리가 난무한 어수선한 여행이었지만, 덕분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제주도! 하면 고사리!를 먼저 떠올린다. 12년 전 엄마가 그랬다. '제주도하믄 고사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