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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Sep 23. 2024

어디를 보아도 천국의 풍경

두브로브니크 성벽을 걷다

두브로브니크를 여행지로 선택했을 때 '두브로브니크 성벽'만 다녀와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성벽이 두브로브니크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나는 언니들에게 다른 곳보다 성벽을 먼저 가자고 졸랐다. 무릎이 아파 걷기 싫어하는 작은 언니도 성벽을 간다는 것에는 동의를 하였기에 여행 이튿날 우리는 두브로브니크 성벽을 걷기로 하였다. 


첫날 스트라둔 대로를 걸으며 성벽 운영 시간을 확인한 바, 여름 성수기에는 저녁 7시 30분까지 영업을 한다고 했다. 우리가 방문했던 8월 셋째 주는 작열하는 태양이 최고의 전성기를 누릴 때여서 한낮의 기온이 40도를 육박하고 있었다. 한낮을 피해 늦은 오후에 가자고 합의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먼저 다녀온 사람들이 써놓은 후기들을 보니 어떤 이는 2시간이 걸린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4시간이 걸렸다고도 하였다. 

50대 초중후반의 여인네들인 우리는 최대한 천천히 걸어서 완주를 한다는 계획이었기에 젊은이(?)들이 걸린 최대 시간에 맞춰야 했다. 그래서 잡은 성벽 투어 시작 시간은 오후 4시였다. 


숙소에서 제일 가까운 입구는 올드 타운의 서쪽 입구인 필레문 바로 옆에 있었다. 입장료는 인당 35유로. 세 명이니 105유로. 검표원 말로는 이 티켓으로 한번 내려가면 재입장이 불가하다고 하였다. 다른 출입구 2곳에서 표 검사가 있을 수도 있으니 표는 잘 간수하라고도 하였다. 

크로아티아는 원래 쿠나라는 돈을 사용했는데 2023년 1월부터 유로화 사용을 승인하였다. 유로화 사용은 여행객들에게 편리하다. 환전을 두 번할 필요가 없고 남은 돈은 다른 유럽에서 사용하면 되니까 잔돈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참 좋았다. 


개찰을 하자마자 맞닥뜨린 게 가파른 계단이었다. 초장부터 언니들은 '아이고, 아이고'를 타령처럼 읊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고'타령 뒤에 제일 처음 대면한 성벽 위의 풍경은 '와~!'라는 외침으로 변하였다. 

그래, 이거지! 이 맛에 여행 오는 거 아니겠어!

광고나 여행 프로그램에서 흔히 보이던 벽돌색 지붕과 에메랄드 빛 바다가 태양빛과 한데 어우러져 여름의 천국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앞을 보아도 옆을 보아도 탄성밖에 나오지 않는 자연과 인공의 아름다움의 조화가 바로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 풍경을 눈에 가득 담고서 각자 핸드폰을 들고 카메라 셔터를 마구마구 눌러댔다. 어디를 찍어도 천국의 풍경이었다. 그 어떤 고성능 카메라도 숨이 멎을 듯한 벅찬 풍경을 온전히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사진을 보면 추억이라도 건지겠지, 싶어서 우리는 수십 장을 그곳에 서서 사진을 찍어댔다. (성벽을 한 바퀴 돌고 나서 보니 그 장소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몇 년 전에, 코로나 이전에, 랜선 투어가 유행하고 관광지에 대한 사진과 영상이 활개를 칠 때 많은 사람들이 말했다. 방 안에 가만히 있어도 온갖 데를 다 볼 수 있고 가는 것과 똑같이 경험할 수 있는데, 이제 사람들이 여행을 많이 안 갈 거라고. 굳이 시간들이고 돈 들여서 힘들게 장거리 비행기 타고 먼 나라를 갈 이유가 이제 없을 거라고.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혹했고 수긍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제적 여행 금지 기간이었던 코로나 시기가 끝나고도 여행은 여전히 성황리에 이루어지고 있고 유명 관광지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다. 사람들은 화면 속에서 풍경을 보면 더욱 그곳에 가고 싶어 하고 실제로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 증명이 된 것이다. 


우리가 두브로브니크 성벽 위에서 벽돌색 지붕과 에메랄드 빛 아드리아해의 완벽한 보색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여행은 실제로 그곳에 가서 그곳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아야 실감이 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야 말았다! 태양이 비추는 각도에 따라 벽돌색 지붕과 녹색 바다는 색을 달리하며 우리를 반겼다. 우리는 지붕에게도 안녕을 고했고 바다에게 반가움을 전했다. 안녕과 반가움의 인사는 성벽을 끝까지 걸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왜냐고? 성벽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 풍경이 바뀌고 빛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바다를 면한 성벽 아래 바다에서는 카약이 여러 대 떠다녔다. 카약 안에는 젊은 청년이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열심히 노를 젓고 있었다. 성벽에 붙은 바위 위에는 다이빙을 하고 다이빙을 기다리는 청춘들이 줄지어 있었다. 

"아, 나도 해보고 싶다."

카약과 다이빙의 욕망을 드러낸 건 막내인 나였고 그저 그들의 체력과 열정을 부러워하기만 한 건 두 언니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욕망과 가능성은 아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불쑥 솟아오른 욕망은 국수 가락보다 가느다란 가능성에 다시 땅 밑을 지나 마그마 속으로 쉽게 가라앉았다. 

성벽 옆에 보이는 다이빙 청춘들과 바다 위의 카약들


첫날 스트라둔 거리를 걸으며 찍은 사진을 보니  세 자매 모두 모자가 어울리지 않았다. 그나마 봐줄 만한 면상이 '못난이 세 자매'가 된 것 같았다. 못생긴 모자 탓을 하며 우리는 모자를 숙소에 남겼다. 속셈은 인생샷을 건져 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생샷 욕심은 따가운 햇볕과 뽀얗던 21호 팩트 쿠션을 씻어버리는 물 같은 땀 때문에 그저 욕심이었던 것으로 판명이 났다.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닦다 보니 얼굴은 뽀얀 색에서 아궁이 앞에서 두어 시간 불을 때다 나온 언년이처럼 붉은색으로 변했다. 깔깔하던 머리도 목욕탕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물기를 가득 머금고 힘 없이 얼굴과 두피에 착 달라붙어버렸다. 옷은 땀으로 절어서 걸을 때마다 친한 척을 하며 각자 몸에 딱 들어붙고 있었다. 

한 시간쯤 걸었을 때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좀 쉬자"를 외치며 때마침 나온 휴게소에 자리를 잡았다. 


작은 피자 한 조각과 과일 주스를 시켜 먹으면서 땀을 식혔다. 그런데 에어컨이 없는 성벽 위의 휴게소라 땀이 식을 뿐이고 시원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늘에 앉아 있을 수 있어서 감사할 뿐이었다. 

너무 더워서 그런가, 두브로브니크에는 여름인데도 파리와 모기가 없었다. 다만, 벌들이 이곳저곳 음식이 있는 곳에 나타났을 뿐이었다. 달콤한 주스가 있어서 그랬는지, 우리 세 자매의 아름다움(?)이 벌들을 유혹했기 때문인지, 휴게소에서 쉬는 내내 벌 두 마리가 우리 주변을 맴돌았다. 꽃에는 벌이 꼬이기 마련인지라~. 우리는 애써 외면을 했지만 끊임없이 달려드는 벌들에게 지쳐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자리를 피해야 했다. 계속 있었다간 벌의 유혹에 넘어가게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작은 언니가 결국 포기 선언을 하고 말았다. 성요한 요새 입구에서였다. 

"나는 더 이상 못 걷겠다. 내려가서 어디 카페에 앉아 있을게. 둘이 다녀온나."

계속 걷다가는 남은 일정동안 무릎을 못 쓰고 계속 숙소에 있게 될 수도 있다는 언니의 말에 큰언니와 나는 얼른 "어서 내려가라. 끝나고 톡 할게."라며 언니를 내려 보냈다. 


큰언니와 나는 우리가 처음 시작했던 필레문 입구까지 계속 걸었다. 성요한 요새부터는 조금 심심했던 풍경들이 플로체문 입구즈음부터 다시 완벽한 보색과 빛의 향연이 시작되어 들고 있던 카메라 셔터를 재가동하였다. 한 바퀴를 다 돌고 보니 플로체문에 있는 성벽 입구부터 민체타 요새를 지나 우리의 출발점이었던 필레문 입구까지 이어지는 코스가 가장 아름답고 환상적인 풍경을 자아내는 성벽 길 코스였다. 

민체타 요새에 올라가서 보는 풍경은 왜 두브로브니크 성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는지, 중세에 건설이 시작되어 계속 증개축을 하면서 단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성벽인지를 알게 해 주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이 천지인 민체타 요새에는 혼자만 올라가서 나 혼자만 이 풍경을 본 것이 너무 아쉬웠다. 언니들에게 보여주려고 사진을 마구 찍어댔다. 똥손인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성벽을 한 바퀴 다 돌고 시간을 보니 오후 6시 30분. 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한 시간을 합하니 약 2시간 30분이 걸렸다. 성벽만 돈다면 두 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다. 우리는 한여름 한낮에 성벽을 올랐음에도 2시간이 걸렸으니 좋은 계절에 건강한 사람이라면 1시간 30분도 충분하지 싶다. 


성벽 투어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이제 남은 여행 기간 동안 숙소에서만 계속 있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번 여행은 이른 아침 버스를 타고 모든 코스를 찍고 늦은 밤 숙소에 가는 빡센 여행이 아니라, 50대의 세 자매가 여유를 갖고 가고 싶은 데 가고 쉬고 싶은 때 쉬는 자유 여행으로 계획했으며, 제일 보고 싶었던 성벽을 구경했기에 다른 곳은 가거나 말거나 다 좋았기 때문이었다. 


숙소로 가면서 우리는 "저녁으로 뭐 먹으까?"만 고민했다. 

언니들의 지령을 받은 나는 바로 구글 맵에서 맛집 검색을 시작했다. 

때마침, 우리 숙소 1층에 해산물 전문 식당으로 유명한 맛집이 있었다. 나는 자신 있게 외쳤다. 

"가자, 맛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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