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브로브니크 숙소에 도착하여 우리는 짐부터 풀었다. 각자 갖고 온 음식, 옷, 세면도구 등을 꺼내고 놓을 자리에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때 작은 언니가 까만 어떤 것을 나한테 툭 던지며 말했다.
"막내야, 이거 니 거다."
"뭔데?"
"수영복. 내 거 하나 사면서 색깔만 다른 똑같은 거 하나 더 샀다."
나는 수영을 배울 때 사용했던 라피도 원피스 수영복을 갖고 갔다. 실내 수영장이나 해변이나 물에 수영하는 건 매한가지. 굳이 돈 들여 해변용 수영복을 따로 살 필요가 있겠냐는 생각을 가진 나와는 달리, 작은 언니는 옷은 장소별 용도별로 입어야 되며 해변에서는 그에 맞는 수영복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새로 해변에서 입을 수영복을 샀는데 가격이 생각보다 비싸지 않아서 동생 것으로 하나 더 샀다고 했다. 역시, 형만 한 아우가 없다! 살짝 감개무량했으나 표현은 그저 "아이고야, 고맙데이" 한 마디뿐.
언니 수영복은 소라색, 내 거는 까만색이었다. 주름 잡혀 나풀거리는 소매가 어깨를 덮고 팔 윗부분까지 내려오는 2부 소매 원피스 수영복이었다. 가슴 라인은 V자 모양이었다. B컵쯤 되는 언니에게는 나름 육감적으로 보이는 가슴골이었는데 초경량 가슴을 가진 나는 아무런 표시도 나지 않는 단점이 있었다. 위에서부터 치마까지 하나로 연결된 원피스 수영복이었는데 치마가 제법 길어서 미니 스커트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자매끼리 똑같은 거 입고 나란히 해변을 워킹해 보자, 마!"
우리는 이렇게 말해놓고 낄낄대고 있었다.
우리가 수영복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으니 큰언니가 혼자서 박장대소를 하였다. 왜 뭐 때문에,라고 묻는 우리에게 큰언니가 말했다.
"아이고야 누가 자매 아니랄까 봐서. 나도 새로 수영복 하나 샀는데 보니까 네 거랑 똑같은 거네. 이거 입고 우리 셋이 나란히 걸으면 똑같이 생긴 동양 여자들이 셋이나 있네,라고 하겠다."
그러고 보니 큰언니가 산 수영복도 똑같은 디자인의 수영복이었다. 확인해 보니 작은 언니와 큰언니는 똑같은 쇼핑몰에서 수영복을 골랐다. 하필 이 디자인이 가격이 제일 쌌다고 했다. 효율과 실용을 따지는 한국 아줌마들의 일상이 여기에서도 드러나는 대목이었던 것이다.
넘사스러워서 나는 그냥 내가 갖고 온 실내수영장용 수영복을 입으려고 했는데 언니들이 "야, 이왕 산 거 입자. 똑같은 거 입고 같이 외국 해변에서 한번 걸어보자!"라고 으싸으싸 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호응을 하였다. 실은 내가 갖고 간 수영복보다 언니가 사 온 까만 수영복이 더 이쁘기도 했었다.
도착 다음날인 여행 2일 차 오전에 우리는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아 C, 수영복 이거 작다 끼인다.
-아이다. 원래 그렇게 꼭 끼이게 입는 거다. 근데 가슴이 넘 파인 거 아니가?
-치마가 짧아서 해변까지 갈 때 위에 뭐 입고 나가야 되겠다. 누가 뭐라 하겠다.
-맞나? 그럼 이 위에 뭐 입지?
반팔 원피스 수영복 하나를 입으면서 우리는 온갖 걱정을 했다. 수영복 입은 채로 차마 바로 거리에 나서지 못하고 가슴과 허벅지를 가려야 한다는, 50이 넘은 유교걸들의 강박에 나와 작은 언니는 원피스를 걸쳐 입었고 큰언니는 티셔츠와 헐렁한 통바지를 수영복 위에 덧입었다. 탈레반도 아니고 시아파 이슬람도 아닌데 얼굴과 팔만 드러내놓고 몸통과 다리는 가리고 숙소를 나섰다.
숙소에서 반예비치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밖은 38도의 기온으로 이미 찜통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무릉도원을 향해 가는 나그네처럼 꿋꿋이 해변을 향해 걸었다.
두브로브니크에서 제일 예쁘다는 반예비치에 도착했다. 시간은 11시가 약간 넘어 있었다. 벌써 사람들로 인해 해변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거의 대부분이 자체적으로 파라솔을 들고 와서 모래사장에 꽂고 태양을 즐기고 있었다.
대부분이 서양 사람이었다. 딱 한 팀. 커플로 보이는 동양인 남녀 한쌍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한국 사람이었다. 내심 반가웠지만 쿨하게 모른 체 했다.
우리는 비치타월을 모래 위에 깔았다. 피부를 보호할 작은 양산도 펼쳐 두었다. 옷은 다 벗어 가방에 잘 모셔두었다. 그제야 해변을 한번 쓱 스캔해 보았다. 우리 세 자매를 제외하고는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꼬마 숙녀도 살집이 넉넉히 잡히는 아줌마도 엉덩이 한 짝이 내 허리크기만 한 아줌마도 전부 다 아슬아슬한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남들의 시선일랑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몇몇은 모래 위에 누워 선탠을 하고 있었고 몇몇은 물에서 수영을 하며 놀고 있었다. 수영복 옷매무새를 손보며 가슴께를 당기고 엉덩이에 끼이려는 수영복 팬티를 당겨내는 사람은 거의 우리 자매들뿐이었다!
해변에 앉아 바다를 쳐다보았다.
"우리도 물에 드가서 놀자"
나는 언니들의 손을 잡아끌었다. 바다로 뛰어들었다. 바닷물은 냉장고에서 막 꺼낸 냉수처럼 시원했다. 10분을 걸어오는 동안 내 몸을 덮었던 땀이 말끔히 씻겨 내려갔다. 시원한 바닷물에 언니들도 발을 담갔고, 무릎을 내주었고, 허리께를 바다에 맡겼다. 아드리아해의 바닷물에 얼굴까지 맡겨버린 건 나와 큰언니였다. 물이 무서운 작은 언니는 허리까지 내준 걸로도 이미 큰일을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바닷속에서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물장구를 치며 오리처럼 발도 동동거리며 철없이 놀았다. 여기선 주책 부린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었다. 나이에 상관없이 우리는 그냥 놀러 나온 청준이었다.
수영을 하다 보니 수영복에 딸린 반팔도 거추장스러웠고 바닷물에 치이는 수영복 치마도 거슬렸다. 내 몸을 감싸는 것이 적을수록 물에서 놀기가 더 편하다는 것을 알았다. 한국의 바다였다면 타인의 시선 때문에 이런 것을 느끼지 못했을 것인데, 거의 맨몸 천지인 남의 나라 해변에서는 싼 가격에 산 똑같은 원피스 수영복이 불편해졌다.
"언니야, 우리도 다음엔 비키니 사서 입자. 저 배 나온 아줌마도 비키니 입은 거 보니 예쁘기만 하네."
부러움과 아쉬움이 뒤섞인 내 말에 언니들도 이구동성으로 동의를 하였다.
"그래, 꼭 그러자"
두 시간 넘게 우리는 반예 비치에서 수영도 하고 선탠도 하고 간식도 먹으며 아이처럼 놀았다.
뜨거운 태양아래 반예 비치의 모래는 계란을 구워도 될 만큼 뜨거워서 맨발로 다닐 수가 없었다. 무좀이 있으면 고온 때문에 다 치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태양에 지치고 기력이 달릴 때까지 논 우리는 짐을 싸들고 다시 숙소로 되돌아갔다.
되돌아가는 길에 옷은 가방 속에 그대로 있었고 우리는 짧은 원피스 수영복 차림으로 걸어갔다. 유교걸의 관념은 이미 바닷물 속에 용해되어 버렸다. 뜨거운 한낮 두브로브니크의 거리에는 비키니에 시스루 랩스커트 하나만 살짝 두른 여인네들이 수두룩 빽빽하였다. 거리낌 없는 그녀들의 워킹에 우리 세 자매도 자신감을 찾았다.
숙소로 돌아가는 우리의 발걸음은 비록 너저분한 짐과 머리에 딱 붙은 미역 같은 머리를 하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한 워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