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몰랐던 사람이 하나를 알고 나면 자신이 그것에 대해서 세상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듯, 글쓰기 강좌를 두어 번 듣고 나서 나도 그쯤은 할 수 있겠다는 오만이 내 속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내 안에 자리 잡은 오만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을 쓰기 위해 자판 위에 머물러있는 내 손 앞에서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세 줄 이상 앞으로 나아가는 못하는 화면 위의 깜빡이는 커서 앞에서 '할 수 있겠다'던 내 오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없었다. 오만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겸손도 아닌 발끝까지 떨어진 자존감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할 말이 없는 작가는 쓸 말도 없다 할 말이 있어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면 쓸 수 없다 어떻게 써야 할지 알아도 직접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나 같다
-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중에
인터뷰 작가 지승호가 정유정 작가를 인터뷰하여 그의 소설 작법에 대하여 쓴 책 <이야기를 이야기하다>에서 정유정 작가는 위와 같이 말했다.
나는 할 말은 있지만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모르는 작가 지망생 후보를 희망했지만 직접 아무것도 해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 아는 것 하나 없고 모르는 것 투성이였던 것이다. 이런 내가 무료 강좌 두어 번 듣고 글을 써보겠다고 깝죽거리고 있다가 비로소 글을 직접 써보려 하니 손은 움직여지지 않고 뇌는 수면 상태로 돌입해버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설레발을 쳐댄 것이다. 50쪽짜리 '걸리버 여행기' 동화책을 읽고 그것이 전부일 줄 알고 400쪽짜리 완역본을 읽은 사람 앞에서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초등학생처럼.
<이야기를 이야기하다>의 목차
정유정 작가는 습작 기간만 6년을 거쳤고 등단 심사에서 몇십 번을 떨어졌다. 글 솜씨가 워낙 좋아 등단도 하기 전에 소설을 출판한 이력이 있었던 정 작가는 탈락 심사평을 보고서야 현실 자각 타임을 갖고 다시 공부에 몰입했다.
좋아하는 스티븐 킹의 소설을 필사하고 분석하고 해부하고 연구하며 소설을 쓰는 법에 대하여 고시 공부하듯 열심히 했다. 공부를 그렇게 했으면 서울대는 너끈히 가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정 작가는 회고했다.
요즘에는 등단 절차를 거치지 않고서도 글과 소설을 출간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실제로 그런 방법으로 이름이 활자로 찍혀 책이 출간되고 서점에서 많은 판매부수를 올리고 있는 작가들이 많이 있다. 나는 그들이 쉽게 그것들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나 보다. 조금의 노력을 보태면 나도 그들처럼 될 줄 알았나 보다.
하지만 직접 하고 보니 나는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이 한 시간이 넘게 걸리기도 하고 그렇게 쓴 내 글은 쓰면 쓸수록 조악해졌고 허무해졌다.
'무엇'만 있고 '어떻게'가 없으면 글이 조악해진다 '무엇'은 없고 '어떻게'만 있으면 글이 허무해진다
-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중에
정유정의 <이야기를 이야기하다>는 무엇을 쓸 것이며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하여 구체적 방법을 알려준다. 물론 이것은 모두의 방법이 아닌 정유정 자신의 방법이다. 많은 연습생들은 스타의 성공담을 듣고 벤치마킹을 하고 있다. 그 성공담과 방법의 일부가 누구나에게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중에 나도 포함될 수 있다. 조악하지 않고 허무하지 않는 것을 쓰기 위해선 뭐든 해야 할 것이니까.
PS: 이제부터 '서평'이라고 안 하기로 했다. 내가 쓴 것은 서평이 아니라 겨우 몇 줄 끄적이는 개인적 소감이었다. 뭘 모르고 이름 붙였던 오만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