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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Jul 24. 2020

리처드 매드슨 - <나는 전설이다>

나는 전설이다는 제목은 불행히도 TV 드라마에서 처음 보았다. 김정은이 나오는 무슨 록밴드에 대한 드라마였던 것 같은데, 초반 그것도 중간중간 보다가 말았다. 흥미를 끌만한 어떤 것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전설이다는 제목의 책을 봤을 때 선뜻 읽지 못하고 그 주변만 어슬렁거렸다. 실망할까 봐. 그래서 내 시간이 투여된 것이 아까워질까 봐. 내 안목의 저퀄이 들킬까 봐.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이 전설이 그런 전설이 아니고 진짜 좀비계의 전설적인 작품임을 듣고 바로 책을 집어 들었다.


아, 나는 왜 이제야 이 책을 읽었던가.


지금껏 좋아하는 좀비, 호러물을 문자로 영화로 접했을 때 그 충격을 훨씬 더 신선하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


소설의 도입부는 미국 드리마 시리즈 워킹데드 시즌 1의 1화와 아주 흡사해서 워킹 데드를 먼저 본 나로서는 워킹 데드가 이 소설을 따라한 건지 이 소설이 워킹 데드를 참고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물어보나 마나 한 질문이지만. 소설에서는 핵전쟁 이후라고 설명되어있지만 솔직히 책을 읽으면서 핵전쟁에 대한 부분이 있었나 싶다. 아무튼 어떤 큰 사건 이후 지구는 이상한 모래바람이 계속 불고 그 와중에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병으로 - 그 병이 안색이 창백해지고 몸에 기력이 없고 그래서 계속 누워있고- 죽어나간다. 그런데 죽은 사람들이 또한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걸어 다니면서 살아있는 사람들의 피를 빨면서 그 생명(?)을 계속 유지하고 전염이 되고 있고 이 중에 로버트 네빌이라는 30대 후반의 남성만이 과거 전쟁 때 박쥐한테 물린 경험으로 인해 면역이 생기면서 모든 이들이 다 죽고, 혹은 걸어 다니는 시체가 되는데 네빌만이 혼자 살아남아 집을 요새처럼 만들어 살아가면서 만나는 에피소드 혹은 그 이야기이다.


이 책은 1954년에 쓰여졌는데, 1976~8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저자는 1950년대에 생각한 가까운 미래에 (1970년대 중반, 약 20여 년 이후) 지구적 종말이 다가올 거라 생각한 것 같다. 아마도 그 시절 미국은 흑백의 인종 차별로 인한 극적 대립, 베트남 전쟁의 참전으로 인한 찬반 양극 대립, 이른바 메카시즘이라 오늘날 일컬어지는 공산주의 광풍으로 인한 국가의 의견 대립과 분열이 팽배한 시절이라 작가는 이렇게 대립이 치닫다가는 곧 큰 재앙이 올 거라는 비관적 세계관을 품었던 걸까. 가까운 미래를 멸망 정도의 수준까지 생각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는 3가지 정도의 생각이 들었다.

 

네빌은 어쨌든 3년간을 집을 요새화해서 혼자서 철저히 혼자서 살아남았다. 계속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혹시나 자기가 같은 처지의 살아남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지만 날이 갈수록 그 희망은 희미해진다. 이 속에서 관연 혼자 살아남는다는 것이 그 무슨 의미가 있을까? 책 속에서 진짜 아무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말도 한마다 할 수 없는 처지에서 혼자서 먹고 미시고 좀비와 투쟁하고 또 날이 밝아오고 집을 수리하고 먹고....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나라면 중도 포기했을까 네빌처럼 계속하던 대로 할 수 있을까. 


말미에 다른 방식으로 살아있는 사람들과 조우했을 때, 네빌은 스스로 전설이 되었다. 과연 다른 방식으로 살아있는 다수의 대중이 참 사람인가, 끝까지 순결한 네빌이 참사람인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살아있어 또 다른 방식의 생활과 문화를 만들어 사회를 창조해나가는 것이 진리인가, 본연의 모습대로 가는 것이 진리인가. 이 역시 두 그룹의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그룹의 돌연변이들이 살아있는 시체를 처리하는 방식을 보면서 네빌은 그들의 비인도적이고 광적인 폭력양상에 과연 이들이 인간적인지 살아있는 시체들이 더 인간적인지 잠시 주춤하면서 과거 이웃이었던 벤 코트니에게 약간의 동정과 연민을 느끼는데, 의식 있는 살아있는 한 그룹의 무리와 살아있는 시체 이 둘 중 과연 누가 좀 더 사람과 인간에 가까운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1950년대에 이런 생각을 해내고 이야기로 써나간 작가의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정신에 두 손 가득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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