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두면 쓸데있는 신비한 잡학사전(알쓸신잡) 시즌 3에서 부산 편에서 나온 한 장면에 나는 큰 공감을 하며 낄낄댄 적이 있다.
김영하 작가가 부산에서 강연을 한 후 청중들한테 질문을 받았다. 어떤 사람이 손을 들고 이렇게 물었다.
"이런 거 또 언제 합니까?"
직설적인 질문에 당황했던 김영하는 이후 부산 사람인 아내에게 그 질문을 되물었고 아내가 답한 그 질문의 의미는 다음과 같았다.
"오늘 강연 너무 좋았고, 다음에 이런 기회가 있으면 또 참여하고 싶은데 언제 또 하실 계획인지...?"
김영하는 또 다른 질문을 받았다.
"뭐 보고 작가 됐어요?"
이것 역시 김영하를 당황시키긴 마찬가지였는데 역시 아내에게 그 질문의 진의를 확인해보았더니 아내는 다음과 같이 해석해 주었다고 한다.
"작가가 되려면 많은 책을 읽으시고 많은 작가로부터 영향을 받으셨을 줄로 압니다. 특별히 영향을 받은 작가나 작품이 있으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이 에피소드를 나누면서 출연진들이 부산 사람들의 화법에 신기해하고 즐거워할 때 화면에 쓰인 자막은 이랬다. "더 이상 길게 얘기해서 무엇하리..."
이 자막을 보았을 때 자막을 쓴 PD가 부산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경상도 사투리의 특징과 핵심을 잘 짚어낸 '주제 파악'이 썩 잘된 글귀였기 때문이다. 내가 자라는 동안 듣고 썼던 화법은 대충 이러했다.
타인에게 말을 할 때는 가능한 짧게 한다. 짧지만 최대한 의미 파악이 되어야 한다(의미 파악을 해야 한다). 빙빙 돌려 말하지 말아야 한다. 줄일 수 있는 한 최대한 줄여 말의 효율을 높여야 한다.
이렇게 줄이고 줄여 효율성을 최대치로 높인 사투리 중에 웬만한 사람들도 알만한 경상도 사투리는 아마 "마!!!"일 것이다. 이 말은 항상 느낌표를 최소 3개 정도는 붙여주어야 한다. 그냥 "마"라고 하면 단어가 주는 분노와 짜증과 약간 협박을 주려는 듯한 감정이 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라는 단어는 실은 아주 다양하게 두루두루 사용되고 있으며 어미와 어두와 부사, 형용사가 적절히 가미되어 응용과 변형도 아주 다양하다. 아니, 원래 여러 상황과 단어의 조합에 의해 사용되다가 언어생활에 극도의 생략을 선호하는 경상도 사람들이 종국에는 "마!!!"라는 한 음절로 줄인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 롯데 자이언츠 야구에서 상대 투수가 롯데 1루 주자에게 견제구를 던질 때 주로 사용되어 많은 사람들이 야구 응원 용어로 알고 있을 야구장에서의 "마!!!"는 이미 알려진 것처럼 "야, 투수 임마, 오데서 견제구를 던지노? 가만 안 있나, 엉!"라는 긴 말을 "마!!!"라는 한 음절로 줄였다.
- 일곱, 여덟 살 때쯤 집에서 도넛을 구우려고 하다가 기름 온도 조절에 실패하여(성공하는 것이 더 이상한 나이였다) 한 냄비의 콩기름과 한 양푼의 밀가루와 한 그릇만큼의 설탕을 버리게 되었을 때 엄마는 어린 나를 붙잡고 등짝에 매운 손 스매싱을 가하며 파리넬리 저리 가라 할 만큼의 고성으로 말씀하셨다.
"이노무 가시나, 고마 확↗마! 콱 쎄리뿔라마!"
- 고등학교 아침 자습 시간에 떠들고 있으면 어디선가 우리의 떠드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담임 선생님이 교실 문을 열면서 고함치셨다.
"(야, 임)마! 조용히 안 해!"
- 평상시 껄렁하게 다니던 오빠 친구가 동네 어르신(예를 들면 우리 아버지)에게 인사도 없이 그냥 지나치면 날 저녁 밥상머리에서 아버지는 오빠에게 말씀하시곤 했다.
"(글)마 그거 인간 안 되겠더마는. 가캉 친하게 지내지 마라, 알긋나?"
이런저런 어미, 어두, 접속사들과 두루 화목하게 지내던 "마!!!"는 효율성을 따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잘 적응하여 필요한 의미와 존재의 흔적은 한 음절만 남기게 된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화목을 우선하고 효율을 무시하는 다수가 존재하긴 한다.)"마!!!"와 비슷하게 축약과 효율에 최적화된 말에는 "쫌!!!"도 있다.
김영하 작가가 받은 질문처럼 상황에 대하여 완성형의 문장이 아닌 한 문장으로 줄인 경우는 셀 수 없이 많다. 흔한 경우 중 하나가 바로 "여 우얀 일고?"(어기는 어쩐 일이니?)이다.
먼 친척의 결혼식에 우리 4남매가 다 같이 가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이라 반가운 인사를 하고는 식이 시작될 때까지 식장 바깥에서 남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멀리서 똘망똘망하게 생긴 총각 한 명이 우리 쪽으로 걸어오더니 오빠에게 정중한 인사를 했을 때 오빠가 말했다. "니, 여 우얀 일고?"
악수를 나누며 총각은 말했다. "신랑이 지 친굽니더." 오빠와 인사를 나눈 총각은 오빠의 직장 후배였다.
이때 "여 우얀 일고?"는 "이야, 너를 여기서 만나다니 참 반갑다. 세상 참 좁다."라는 의미가 환영과 반가움이 내포된 말이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뉘앙스에 따라 "여 우얀 일고?"는 때로는 "니가 여기 왜 왔니? 초대도 안 했을 텐데 누구한테 이야기를 듣고서 왔니? 반기는 사람도 없는데. 분위기 파악도 못하나 봐."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니가 여기 뭐하러 왔니? 지금 일해야 할 때(혹은 공부 등 다른 할 일이 있을 때)인데 일 안 하고 왜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니?"가 될 수도 있다. 경상도 말은 상황과 경우에 따라 긴 말을 줄여 한 문장으로 표현하기에 같은 문장이나 말이라도 해석이 다르고 뜻이 다르다. 그래서 맥락을 잘 짚어야 한다.
줄임의 미학은 문장의 서술에 특히나 많이 나타난다.
- 한 국자씩 뜨지 말고 병째 들이 봐~라 (병째 들이부어라)
- 쩍벌 하지 말고 좀 오마라 (좀 오므려라)
- 밥 무- (밥 먹어)
- 여 온나 (여기로 와라)
- 눈데?/눈교?/누꼬? (누군데?/누굽니까?/누구니?)
- 냄더 (접니다)
- 말라꼬?/만다꼬? (뭐할라고?)
예를 들라 치면 한도 끝도 없을 만큼 줄임의 말은 일상의 말이요 생활의 언어이다.
글자로 놓고 보아도 그렇지만 앞뒤 자르고 이 문장들만 듣게 된다면, 누군가에게는 이 일상 말들이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고 투박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내 일상의 말이 조금씩 변하고 가식이 자꾸 더해지고 있다.
부산 옆 조그만 중소도시에서 살다가 수도권으로 옮겨온지 두 해하고도 반년이 지났다. 고향이 아닌 곳에서 쓰는 생략의 언어는 소통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같은 말을 두 번씩 반복하기도 하고 단어와 문장을 바꾸어 말하기도 하였다. 상대방이 단번에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이 정도 노력은 기꺼이 해야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내 안에 가식이 쌓이는 것을 느낀다. 가끔 상대를 알 수 없는 신경질적 증세와 우울이 번갈아가며 찾아오기도 한다. 마치 어설프게 배운 외국어 실력으로 가지고 해외유학이나 이민을 가서 뭔가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모국어로 속시원히 해명을 하지도 반박을 하지도 분노를 터트리지도 못하고 학교에서 배운 어설픈 제2외국어로 내 심정을 말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일종의 '언어의 향수병'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