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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키코모리 K선생 Feb 12. 2024

자기혐오 : 외출을 가로막았던 수치심과 공포

동굴 속 이야기 여덟

회복을 결심한 뒤 하루 목표는 3가지였다. 30분 햇볕 쬐기, 8시간 수면, 하루 한번 편의점 다녀오기. 편의점을 다녀오는 것은 난관이었다. 누군가를 마주치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두근거리고 껄끄러웠다. 이 거북한 기분을 이겨내는 것부터가 고역이었다. 몇 번의 관찰로 새벽 4시가 히키코모리에게 가장 안전한 시간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편의점을 다녀오는 일과는 곧 정착되었다.

2023년 11월 편의점 앞 횡단보도. 새벽 4시 이 시간은 사람도 차도 없다.


편의점에 다녀오는 일과는 정착되었지만 그래도 나가는 일은 매번 가슴을 졸이는 일이었다. 외출은 문 앞에 서서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시작했다. 발소리가 들리면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가 밖이 조용해지면 발바닥이 부드러운 운동화를 신고 계단을 조용조용 내려갔다. 조심한 보람도 없이 출입문은 주책없이 시끄럽게도 열렸고 누군가를 마주칠까 두려워 편의점을 향해 후다닥 뛰었다.


새벽 4시. 회복을 결심한 뒤 매일 한 번, 내 유일한 외출 일과는 매번 그렇게 시작되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을까?




우울증 히키코모리인 내 외출을 가로막았던 수치와 공포는 어디서 오는 건지 설 연휴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내 모습이 만족스럽고 자신감이 넘치면 타인의 시선이 느껴질 때면 그 모든 시선은 부러움과 칭찬의 눈빛으로 느껴진다. 건전하지 못한 내 사고방식에서 타인은 자의식의 투영이었다. 


내가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수치심과 공포는 다름 아닌 타인에게 투영된 나 자신에 대한 혐오였다. 스스로 잠시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끔찍한 자기혐오였다매 순간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자기혐오를 타인에게 투영해 나 스스로에게 퍼부어댄 것뿐이다. 그것이 우울증 히키코모리인 나의 외출을 가로막는 것들의 정체였다.

동창, 모임친구, 직장동료를 마주치면 어쩌지? 내 실패를 들키면 어떻게 하지? 내 초라한 모습, 추악한 면이 모두에게 알려지면 어떻게 하지? 내가 몇 년째 백수라는 사실을 우리 동네 사람들이 알면 어쩌지?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 시간에 한가로이 벤치에서 햇볕이나 쬐는 날 한심하게 보는 것 같아. 왜 절룩거린 걸까? 병원을 다니지 않을 정도로 자기 관리를 안 하는 거야? 이 시간에 왜 이 사람은 여길 계속 오는 걸까라면서 날 부담스럽게 바라보는 것 같아... 끝이 없다.
할 수만 있다면 가면을 쓰고 다니고 싶었다


타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어리석은 사고방식을 왜 갖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은 나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와 타인의 시선이 조금은 분리된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좀 더 의식적으로 분리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고 있다.


이런 단순한 결론과 건전한 생각은 뇌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현시점에서 가능한 것이고 한참 바닥으로 추락 중인 나는 이런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재확인하게 된다.




우울증 히키코모리가 되면서 밖에서 하는 일들은 최대한 회피하게 되었다. 상상만 해도 땀이 나고 심장의 두근거림이 온몸으로 느껴질 만큼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이다. 밖에 나가기라도 하면 다른 사람의 시선을 과하게 의식했고 수치심을 느끼며 공포를 느꼈다. 


첫 정신과 진료를 방해하는 것도 다름 아닌 외출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공포였다. 부모님이 정신과 치료를 권유했을 이런저런 말로 회피했었다. 정신과 진료에 대한 거부감은 전혀 없었다. 오로지, 사람을 마주친다는 것이 너무도 꺼려지고 두려울 뿐이었다. 


부모님은 처음엔 정신과 진료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회피한다고 생각하셨고, 그다음엔 게을러서 치료를 거부한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그걸로 가끔 화를 내시기도 했다. 난 멀뚱거리거나 변명을 할 뿐이었고 정신과 진료는 지지부진 나아가질 못했다. 그리고 이런 양상은 정신과 진료뿐만이 아니라 외출과 관련된 것들은 모두가 이렇게 지지부진하게 되어버렸다. 취업도 마찬가지다. 히키코모리 생활을 하면서도 몇 번의 괜찮은 제의를 받았지만 나름의 핑계를 만들어서 모두 거절해 버렸다. 사실은 두렵고 상황을 회피하고 싶고 나가고 싶지 않았다.


당사자가 말해주지 않으면 모를 수밖에 없고 갈등이 생기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히키코모리가 느끼는 외출에 대한 스트레스가 어떤 것인지 조금 일찍 부모님과 소통했더라면 어땠을까? 정신과 선생님의 도움도 일찍 받고 불필요한 갈등도 덜어내고 좀 더 빠른 회복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우울증 히키코모리가 밖에 나서는 스트레스를 설명한다면? 아마도 벌거벗고 강남역 한복판에 서는 기분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감당할 수 없는 부끄러움, 수치심, 공포, 스트레스 그 자체다. 그만한 수치심과 공포를 견뎌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히키코모리가 외출을 하지 못하는 이유다. 개인에 따라 감정의 크기와 동반하는 신체 증상에 정도의 차이는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별거 아닌 작은 일로 취급하거나 쉽게 간과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린 본인의 감정에 상처를 주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로도 절연한다. 그만큼 우린 감정에 민감하고 크게 영향을 받는다. 벌거벗고 밖으로 나가야 하는 상황이 있다. 또는 나가도록 만드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나 자신을 위한 행동이란 걸 알아도 공포에 압도되어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만약 중증 히키코모리에게 집 앞이니까 위로하게 나오라고 말을 한다면 그것은 벌거벗고 나오라는 말과 동일한 압박감을 지닌다. 히키코모리가 선의의 마음에 응하지 못할 때, 수치심과 공포의 크기에 압도된 것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다.




'수전 손택'이란 작가가 있다. 그녀의 책 <타인의 고통 - Susan Sontag, 2003>은 전쟁에 고통받는 사람들과 그것을 미디어로 '나와 관계없는 따분한 얘기'로 소비하는 우리의 관계를 통찰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히키코모리 개인의 고통으로 치환해도 괜찮은 지점의 내용들이 있다. 책의 메시지는 '겪어본 적 없는 우리는 말해줘도 이해하지 못한다. 알아듣지 못한다.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우리의 특권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관심을 갖고 성찰해야 한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럴듯하게 맞닿는 지점이 있다. 

Q. 결국 어떻게 첫 정신과 진료를 받았나?
A. 어머니가 나한테 가고 싶은 정신과를 찾아서 알려달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난 조금 멀어도 사람을 마주치지 않는 병원으로 골랐다. 지하 2층에 주차,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마자 바로 병원에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정신과를 택했다. 예약도 오후 진료 시작인 2시로 예약해서 진료실에 바로 들어갈 수 있게 했었다. 그렇게 세세한 것을 신경 쓸 만큼 당시엔 너무도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Q. 우울증 히키코모리에게 새벽 4시가 괜찮은 시간인가?
A. 3시는 술을 마시는 사람이 오가고 5시는 버스 첫차를 타기 위해 사람들이 오간다. 새벽 4시는 그 두 부류의 사람들 모두가 다니지 않는 시간이라서 사람이 없고 조용하다. 히키코모리가 외출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편의점에 익숙해진 뒤 아침에 걷기 운동을 시작했다. 그것 역시 새벽 4시가 운동시작시간이 되었다.
Q. 땀나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누구나 똑같지 않나?
A. 교육하면서 느끼는 긴장감이 1이라면 5 정도의 느낌이다. 무엇보다 신체적으로 느껴지는 반응과 압박감에 큰 차이가 느껴졌다. 우울증과 마찬가지로 증상이 호전되면 이러한 긴장과 스트레스, 신체적인 반응도 같이 호전되었다.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건데 땀과 심장박동 같은 자율신경반응이 꺼림칙한 느낌을 갖게 만들면, 그것이 어떤 행동을 저지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고 했다. 아마도 그런 부분이 외출에 대한 공포와도 연관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다.
Q. 공포감을 느낄 때 '인데놀'과 같은 약을 먹고 외출하면 되는 거 아닌가?
A. 의사 선생님께서 인데놀을 처방해 주셨는데 약을 빌려서 외출하면 '약을 먹지 않았을 때는 나갈 수 없게 되는 게 아닐까'란 생각에 약을 회피했다. 환자의 오만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은 정신과 선생님과 면밀히 상담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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