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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데와소피 May 14. 2019

독립과 이주를 경험할 사람들에게 - 3편

서울내기의 지방살이

대구로의 독립과 이주에 관한 마지막 편지입니다.
혹시 이 편지를 처음 접하신 분이라면 첫 번째,
두 번째 편지를 읽고 오시면 좋겠어요! 






마지막 편지를 쓰면서 잡지 <어라운드  65호>를 읽게 됐습니다. 아주 우연히도 이번 호의 주제는  'CITY'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편지를 쓰게 된 맥락을 잘 설명해준 글귀를 만났습니다. 이 글귀로 마지막 편지를 시작할게요.



어떤 장소를, 한 도시를 글로 옮긴다면 필연적으로 그 글에는 나를 통과한 그곳의 이야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것은 '나'라는 보잘것없는 도구 하나일 뿐이며, 우리가 믿어야 할 것도 그 도구 하나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정직해져야 한다. 그러나 정직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하나의 글은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겠지만, 어찌 됐든 타인에게 읽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그 글은 타인에게 보내는 한 통의 긴 편지여야 할 것이다.  
- 〈어라운드 65호〉 중 '두 사람의 베를린'(글: 한수희)


ⓒ 어라운드 65호 〈City〉 





그렇다해도. 대구, 살기에 좋은가요?


이전 편지에 대구에서의 어려움을 많이 설명한 것 같네요. 그렇다 해도 대구는 주거하기에 좋은 도시입니다. 일단 '사통팔달!' 길이 잘 뚫려 있어서 도시 내의 이동이 비교적 쉽습니다. 게다가 좁은 골목이 많고 언덕이 많은 서울에 비해 대구는 길이 넓고 평지가 대부분이라 자전거를 타거나 걷기에 좋습니다. (물론 미로 같은 동성로 내에서는 헤맬 수 있습니다.) 서울에 비해서 대중교통이 촘촘하진 않지만, 웬만한 지역은 대중교통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든 시내로 쉽게 접근할 수 있어, 중앙로역을 중심으로 하는 동성로만큼 큰 부도심이 없는 것도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시내와 가까운 곳에 대구국제공항과 KTX동대구역이 위치해 있어, 다양한 교통망을 통해 다른 도시로 단 시간 내에 쉽게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비해 근접한 곳에 다양한 즐길거리가 많습니다. 영화관, 콘서트하우스, 미술관 등 문화시설이 굉장히 많고 공연 비용은 서울에 비해 저렴합니다. 클래식 공연이든 콘서트든 전국 순회공연을 할 때면 대구는 늘 빠지지 않습니다. 자랑할 점은 시내에 독립영화관이 두 개나 있다는 점입니다. 오오극장동성아트홀에서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상영하지 않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상영합니다. 그리고 영화제를 통해 다른 지역의 영화제에서 놓쳤던 작품들도 볼 수 있고 새로운 기획들도 만나볼 수 있죠. 3년 동안 대구단편영화제와 대구사회복지영화제는 꼭 챙겨서 갔네요.



시민들이 다양하게 참여할 수 있는 축제도 많습니다. 대구시 차원에서 진행하는 '대구뮤지컬페스티벌', '대구컬러풀페스티벌' 등도 있고, 시민들이 주도하는 대구퀴어문화축제와 같은 행사도 있습니다. 축제 외에도 도심에 놀이동산인 이월드와 넓은 공원들이 많아서 가족단위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인프라도 많습니다. 관심만 갖는다면 대구 내의 많은 문화행사들을 누릴 수 있어요. 주거하기에 좋은 도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내가 다시 이주하려는 이유.


저는 도시가 그 도시만의 이야기를 얼마나 잘 만들어내는지, 그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얼마나 잘 듣는지, 그리고 만들고 수집한 이야기들을 지역민들에게 얼마나 잘 전달하는지를 통해 그 도시의 매력을 가늠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대구는 이야기는 많은 도시였지만, 그 이야기들을 지역민들에게 전달하는 데는 미숙한 도시였습니다. 그 점에서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대구의 보수성 때문이기도 합니다. 대구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각자의 역할만큼만 해내길 바라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새로 이주해 온 사람들 뿐 아니라 원래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역할만큼만 해내기. 자신의 역할만큼만 해내면 된다는 말은 긍정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새롭게 무언가를 시도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절망적인 요구입니다. 혹은 그런 요구를 통해 한 발자국 더 나가는 시도 자체를 상상할 수 없게 만들죠. 그럴 '기회'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거기까지만 하고, 역할을 넘어서지는 말아라.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회구조적인 원인보다는 그 문제를 개인에게서 찾고. 각자가 열심히 살아감으로써 당면한 문제들을 개인적으로 극복하길 바라는 도시. 대구는 사람을 배척하는 도시는 아니지만, 여전히 보수적인 도시였습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관통한 도시, 대구입니다. 물론 한국 내 어느 도시가 이를 극복해내고 희망을 품게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도 듭니다. 그렇게 국가와 도시에 대한 환멸이 들다가도 여전히 저는 도시에 살고 싶어 집니다.



도시에는 이끼를 뒤집어쓴 부처의 얼굴이 보여주는 자애로움과 안식의 감각 대신에 피로에 찌든 인간의 얼굴이 보여주는 비정함과 불안의 감각이 자리하고 있을지라도, 나는 그 비정함과 불안이 그것을 가로지르며 발생시킬 이상한 열망에 대해서도 믿기 때문이다. (중략)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감정들 사이를 둟고 나올 저 열망은 어쩌면 우리를 진정으로 살게 하는 동력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나는 그래서 도시로, 다시 도시로 돌아갈 것이다.
- 〈어라운드 65호〉 중 'The City-Affect'(글 김나영, 송종원)



그 불안함과 열망을 함께 나눌 이들이 몇 명이라도 더 있는 도시로. 조금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뜨거운 불안과 반대급부의 열망이 공존하는 도시로 다시 이주하려고 합니다.  지금의 저는 그 열망을 품고 풀어낼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곳에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있으니까요. Photo by John Baker on Unsplash



저를 통과한 대구를, 

대구를 통과한 저를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누가 그러더라구요. 떠나 본 사람은 절대로 떠나기 이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대구에 오기 전에 저는 '날 것'과 같았는데. 어떤 의미로든, 이제 조금은 익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대구의 삶이, 대구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리고 독립과 이주의 경험이 제게 준 것이겠죠. 익은 것이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더 익기 전에 떠나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언젠가 서효인 시인의 시집 <여수>와 같이 저라는 사람을 통과한 도시들의 파편적인 모습들, 그리고 그 도시를 통과한 저의 모습들을 더욱 잘 기록해두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독립과 이주를 통한 도시에 대한 발견과 나에 대한 발견은 결국 인생의 이야기와 다채로운 관점을 만들어 줍니다. 저도 이렇게 여러분에게 들려드릴 이야기가 생겼잖아요? 첫 번째 편지의 두 가지 질문만 통과하신다면 꼭 추천해드리고 싶은 경험입니다. 혹시 길고 긴 편지 세 편을 모두 읽어주신 분이라면 정말 감사드려요:) 앞으로 올라올 책 리뷰와 글들도 이런 저의 여정의 일부분이니 함께해주시길 바라며. 또 다른 글에서 만나요!



오힐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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