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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데와소피 Sep 18. 2019

처음은 흥미로워. 그 다음은 식상해.

'북한 다큐 영화'라는 장르


2019년 8월, EBS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EIDF)에서 <어느 록밴드의 평양방문(Liberation Day)>을 상영했다. 습관처럼 북한 관련 콘텐츠가 있으니 보러 갔고, 감독이 함께한 Special Talk까지 참여했다. 나오면서 실망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사실 이런 실망스러움은 북한을 소재로 하는 다큐영화에 공통적으로 드는 감정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와 같은 영화에 대한 기대도 사라졌다. 다만 '북한'에 대해 무엇이라도 조금 더 발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혹시나 싶어서 영화를 보지만, 다 보고나면 역시나 아쉽다.



북한다큐영화의 장르화


아쉬운 것이 너무 많지만 차근차근 하나씩 짚어보자. 먼저 가장 아쉬운 점은 '북한다큐영화의 장르화'다. 북한을 다루는 다양한 다큐영화가 나오지만, 어쩜 그렇게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한 시놉과 전개를 담고 있는지. 그것도 그럴 것이 배경은 늘 평양과 대도시로 제한되며, 북한 내에서 촬영할 수 있는 장면에는 한계가 있다. 이건 인정. 하지만 전개까지 같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북한 다큐영화를 떠올리면 상상되는 일종의 시나리오가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북한을 주제로 다른 다큐영화 몇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아래에는 약 5년 간 상영된 북한다큐영화 중 국가 별로 한 편씩 골라봤다.


안나 브로이노스키 |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Aim High in Creation!)> | 오스트레일리아 | 2013

콜린 오플랜드 | <평양에서의 데니스 로드맨의 빅뱅(Dennis Rodman's Big Bang in Pyongyang)> | 미국 | 2015

모르텐 트라비크, 우기스 올테 | <어느 록밴드의 평양 방문(Liberation Day)> | 노르웨이, 라트비아 | 2016

닐 퍼거슨 | <마이크 페일린, 북한에 가다(Michael Palin in North Korea)> | 영국 | 2018

피에르 올리비에 프랑수아 | <평양 유랑(Have Fun in Pyongyang)> | 프랑스 | 2019

그레고리 뮐러, 앤 르왈드 | <헬로우 평양(A Postcard from PyongYang)> | 독일 | 2019


북한다큐영화의 공통점은 아래와 같다.

공통점1 북한에 들어가려면 다들 북한에서 무언가를 해야한다. 안나는 북한 사람들에게 영화제작을 배우러 갔고, 데니스 로드맨은 농구를 하러 갔고, 록밴드 라이바흐는 공연을 하러 간다. 마이크 페일린과 피에르는 관찰을 위한 여행을 갔고, 그레고리 뮐러와 앤 르왈드는 마라톤에 참가했다. 공연을 하든 농구를 하든 마라톤을 하든 무언가는 꼭 해야 한다. 공통점2 평양에 가면 반드시 거쳐야하는 건축물 투어와 김일성, 김정일 동상에 절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공통점3 북한 정부 측 사람이 등장한다. 북한에 무엇을 하러 갔는지에 따라 어떤 북한 사람들과 소통을 하게 될지 정해진다. 북한 정부 사람으로 북한 정부의 원칙을 따르면서도 영화 제작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진한 우정을 쌓는다. 통역 및 가이드와 특별히 친해지는 것은 기본 클리셰이다. 공통점4 어느 날 북한이 생각보다 살만한 나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음 날, 북한 정부의 통제와 강압성을 느끼는 사건이 벌어진다. 공통점5 영화를 제작하는 스탭 중 누군가가 일탈함으로써 북한 가이드를 당황시키며 갈등의 요소가 생긴다. 공통점6 조마조마했지만 문제없이 갈등이 잘 마무리된다. 공통점7 한복 입고 가무를 즐기는 "일반" 사람들의 여가 생활이 등장한다. 더 쓸 수 있지만 여기서 멈춰야겠다.


<평양에서의 데니스 로드맨의 빅뱅>  중


역시 북한 정부는 멍청해


두번째로 아쉬운 점은 그나마 소재가 다양한 데 비해 주제와 메세지가 한결 같다는 점이다.


북한 주민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고, 생각보다 북한은 살만한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역시 북한 정부는 멍청하고 발전은 느려!


북한다큐영화가 주는 주제와 메세지는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좋은 영화란 예상하지 못한 메세지와 영감을 줘야하는데 늘 저 메세지가 전개의 대부분이다. 북한도 많은 변화가 있지만 어떤 점에서는 다른 국가에 비해 확실히 변화가 더디다. 매년 다른 감독들이 가서 영화를 찍는다하더라도 북한의 모습을 담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한다면, 사실 전년도에 만든 다른 영화와 큰 차이점을 갖기 어렵다.


세번째로 아쉬운 점은 외국인의 시선이다. 종종 외국인의 시선으로 북한을 과도하게 희화화 하거나 미개한 느낌을 주는 장면은 굉장히 불쾌하다. 모두가 알다시피 북한은 경제적 수준이 높지 않다. 그곳에서 생활하는 것은 당연히 불편할 수밖에 없고, 당신들이 온 나라에서만큼의 편안함을 누릴 수 없다. 때로는 북한에 대한 희화화가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를 바라보는 서양 사람들의 시선인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아무리 다큐멘터리라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는 없다. 이 또한 러닝타임에 따라 선택된 장면이기 때문이다. 즉 이런 장면들은 겪은 일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면서도 외국의 영화 제작자들이 북한을 어떻게 보고 무엇을 강조하고 싶은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북한'이라는 주제로 묶여있는 그들만의 리그


실망스러움은 <어느 록밴드의 평양 방문>의 Special Talk에서 터져나왔다. 상영관에 불을 켜고 보니 대부분의 관객이 외국인이었다. '그래, 지인 혹은 같은 나라 감독의 영화가 영화제에 상영된다고 하니 초대 받았을 수 있지'라고 생각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 한 켠이 불편했다. 외국인들이 질문하는 것을 들어보니 대부분의 관객들은 해당 영화와 관련된 외국의 기업이거나 네트워크 중인 다른 단체 등의 참석자들이었다. 비단 이 영화제 뿐이 아니다. 심지어 국제학술회의나 학술 단체들 행사를 가도 요즘은 비슷한 단체와 회사 사람들이 참석한다. 북한이 폐쇄적인만큼 일종의 그들만의 리그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과 사업을하고, 북한에 관광객을 보내고, 북한을 주제로 연구를 하는 다양한 단체들이 일종의 생태계를 형성하고 콘텐츠를 생성한다. 물론 여기까지는 긍정적일 수 있다.


아쉬운 점은 그 콘텐츠의 질과 수준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확장만 되고 마치 싸이클처럼 자신들의 리그 내에서 순환되는 데 그친다는 점이다.



문제는 소비자들에게도 있다. 관객들의 질문이 이어지자 불편함은 한숨으로 터져 나왔다. 비단 이 영화제 뿐이 아니다. 북한다큐영화를 상영 후 GV나 ST에 참석해보면 매번 비슷한 질문이 나온다.


"북한이 정말로 촬영을 허락해줬나요?"

"북한에서 촬영을 허락해주는 이유가 뭔가요?"

"북한 정부는 일부러 잘 사는 도시만 보여주는거죠?"

"위험한 순간은 없었나요?"

"저기 나오는 북한 사람들은 전부 북한에서 대본대로 하라고 시킨 사람들입니까?"

"북한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는 건 연기인가요? 역시 세뇌당해서 그런 거겠죠?"

"저 북한 가이드와는 이후에도 연락 합니까?"

"김일성-김정일 동상에 절 할 때 무슨 생각을 하나요?"


EIDF <어느 록밴드의 평양방문> Special Talk 중

등등. 이런 질문을 들으면 답답하다. 당연히 궁금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영화 속에서 이미 소화된 장면들도 많다. 이들의 질문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써 다큐영화에 관한 것이 아니라 북한에 다녀온 사람에게 던지는 북한에 관한 질문일 뿐이다. 게다가 이런 질문을 들으면 무대에서 너무나도 주관적인 답변을 할까봐 조마조마해진다. 그리고 어김없이 실망스러운 답변이 나오기도 한다. 소비자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북한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영화를 본다면 북한다큐영화는 '영화'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어차피 본인들이 믿는 그대로 영화를 볼 것이 아닌가.



'북한다큐영화'라는 장르에서 벗어나자


처음에는 관심을 갖고 북한 다큐영화를 찾던 관객들도 이전에 본 영화를 넘어서는 메세지가 없으니 새로운 영화가 나와도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나처럼. 위에서 소개한 북한다큐영화들은 일종의 '입문'단계에 그칠 수밖에 없다. 북한에 대한 호기심으로 평양이라는 도시의 모습, 사람들의 말투와 옷차림 등을 보고싶다면 아주 좋은 콘텐츠이다. 서점에 나와있는 북한 여행을 다룬 책들도 비슷하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는 무엇을 봐야 하는가. 그 이후에는 갑자기 학술서로 단계가 확 높아진다. 북한을 알고 싶을 때 중간 단계에서 접할만한 콘텐츠가 없는 것이 실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나 브로이노스키 감독의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를 추천한다. 줄거리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영화감독인 안나는 자신의 가족과 마을을 시추회사로부터 지키기 위해 선전영화를 제작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최고의 선전영화를 만드는 북한으로 영화를 배우러 떠난다. 실제로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은 영화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다. 스스로 영화제작을 위한 교과서를 쓰기도 하고 감독을 맡아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안나는 이 점을 착안해 김정일 위원장의 교과서대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이 만드는 '평양 스타일'의 영화는 어떨까!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 중


이 영화는 단순히 북한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북한의 영화, 북한의 문화, 북한 사람들의 여가, 북한 내 젠더 문제, 북한의 의사소통 구조, 북한 사람들과의 우정. 그리고 이를 넘어 전 세계적 환경 문제, 노동 문제, 북한을 포함해 우리가 함께 넘어서고 싶은 그 '무언가'까지. 굉장히 다양한 층위를 담아낸다. '북한다큐영화'라는 장르를 벗어났을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영화가 북한다큐영화들이 도달해야 할 다음 단계가 아닐까 감히 이야기해본다. 북한이라는 소재를 떠나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고 훌륭한 영화! 이제는 사람들이 북한을 소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북한이라는 소재를 넘어서는 가치와 의미를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콘텐츠들이 나올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북한다큐영화제작자들이여 더 이상 당신들의 리그에 갇혀 뻔한 영화를 만들지 말고 각성하라!




글. 오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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