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와, 시어머니는 처음이지?
지금으로부터 1,724일(만 4년 8개월 20일) 전, 나의 이 기막힌 동거가 시작된다. 그 때는 몰랐다. 이 동거의 시작이 나의 첫 도서의 주제가 될 줄. 혹시나 시어머니 흉보는 이야기가 되거나 반대로 우리 시어머니 최고라고 외치며 육아로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위로는커녕 자랑이 되지 않을지 시작부터 자기검열 하느냐 문서파일 켜는 것 조차 주저하고 있었으니 나도 이 글의 끝이 어디로 갈지 대단히 궁금하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삶이 ‘사람 사는 이야기에 대한 재미’와 ‘성장통을 수반한 성장’이 있었기에 이 글이 부디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위로가, 시어머니와 함께 살 준비를 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용기가 되어주길 소망한다.
결혼한 지 만 3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갖지 않자 은근한 압박이 들어왔다. 정확히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가 맞다. 조금 이른 나이에 결혼 했기에 급하게 임신을 계획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임신을 피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였다. 왜 아이가 안 생기지 하고 궁금한 마음에 찾아간 산부인과에서 우리 부부는 단숨에 ‘난임부부’가 되었다. 갑작스레 추천받은 검사를 여러 개 받았고, 그 중 한 검사에서 난소 나이가 42세라는 진단을 받았다. 당시 나이가 서른이었으니 참으로 당혹스러운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때 의사 선생님이 과자 많이 드세요? 라고 묻는데 난 원래 치아에 끼는 게 싫어서 과자는 입에도 안된다고 했더니, 그럼 어릴 때 과자를 많이 먹었냐고 되물었다. 그렇게 나는 되돌릴 수 없는 ‘과자를 많이 먹던 과거의 나’를 책망해야 했다.
그 땐 그 말이 왜 그렇게 섭섭했을까. 한강 다리를 건너며 시어머니가 나한테 한약 먹으라고 했다고 애매한 남편 붙잡고 서럽게 울었다. 결혼하면 당연히 아이를 낳아야지 하고 생각하던 터였기에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어쩌나 불안해 하던 찰나였고 그저 그 순간 울고 싶으니 누군가 뺨이나 때려줬음 좋겠다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용하다는 한의원 찾아가서 한약을 두 첩 지어먹었다. 그 때 한의사 선생님께서 양학에서 말하는 난소 나이 따위는 잊어버리라고 한 말씀이 꽤나 위로가 되었다.
그 사이 남편은 퇴사했고, 자연임신이 되었다. 나름 간절히 기다려 찾아온 아이였기에 일 따위 얼마든 떼려 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나름의 철학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채 엄마가 되었다.
임신 10개월. 입덧도 없었고, 비교적 잘 자고 잘 먹고, 막 달엔 자연 분만하겠다고 16층 계단도 올라다니며 친구들 불러다 밥 해먹이고 하면서 재밌게 임신 기간을 보냈다. 고기 먹고 출산하러 가면 애 낳기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진통 중에 돼지갈비도 먹었다. 그렇게 전쟁의 서막이 시작될 줄 모르고 인생 니즈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진통 온 지 12시간이 지났고, 양수가 터졌는데도 자궁은 2cm 밖에 열리지 않은 상태였다. 아이 머리는 골반 크기보다 컸고 난산이 예상되어 크리스마스이브 밤 11시에 긴급 수술에 들어갔다. 그 와중에 생일이 성탄절이면 좋겠으니 30분만 참았다 들어가면 안되냐는 어이없는 부탁을 내가 하고 있었다.
수면 마취에서 깨어 눈에 보이는 간호사 한 분을 붙잡고 아이의 건강을 확인하였으나 아무도 답변하지 않았다. 불안이 엄습했다. 임신 10개월 내내 모든 검사에서 별 이상 없었고, 막 달 검사에서는 체중이 4.2kg이 나갈 정도로 무럭무럭 잘 크고 있었던 아이가 내 눈 앞에 없었다.
그 날 밤, 수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던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남편은 그 눈 바람 맞으며 앰블런스타고 소아외과가 있는 병원을 찾아 헤맸다. 처음 찾아간 병원에서는 담당의가 휴가를 갔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찾아간 병원에선 간호사 분이 너무나 평온하게 아이를 받으며, 내일 다시 오라고 하였단다. 남편은 그렇게 응급실 문 앞에서 눈 오는 그 밤의 장면이 수채화의 한 장면처럼 남아있다 지금도 말한다.
선천성 기형. 쇄항
첫 아이의 병명이였다. 명성왕후는 첫 아들을 쇄항으로 잃었다고 하던데, 21세기에 태어나 수술 받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갑작스레 찾아온 불행 앞에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5,000명의 출생 당 1명 빈도로 생긴다는 이 기형이 왜 우리 아이에게 찾아왔을까 원망도 들었다. 내가 혹시 너무 컴퓨터 앞에서 오래 일해서 그런 것일까 자책하다가 명성황후를 생각해 보니 원인이 그 때문은 아니였으리라 마음을 다 잡아봤다.
아이는 쇄항 중에 고위 기형으로 생후 6개월 이내 3차례의 큰 수술이 예정되었다. 먹고, 자고, 싸는 것이 전부인 신생아에게 예정된 3차례에 한 차례 더해 네 번의 수술 기간 동안 먹는 것도 싸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던 아이가 안타까웠다. 소아중환자실이다 보니 미숙아부터 고위험군의 아이들이 많은 틈에 3.9kg으로 태어난 우량아 아이를 두었건만 창피한 줄도 모르고 우리 부부는 엉엉 우는 울보 부부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쇄항은 선천성 기형 중에 비교적 흔한 질병으로 쇄항 아이를 둔 부모님들이 모여 치료법과 예후를 공유하는 블로그도 있었다. 당시 첫 수술을 앞두고 초조해 하는 부모의 글에 ‘지금 우리 아들 7세이고 제 옆에서 노래 부르고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댓글이 큰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의 아들은 7세이고 내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아이 낳고 6개월은 정말 전쟁이였다. 6개월의 절반은 병원에서 보내야 했고, 나머지 절반은 산후 조리도 못한 육아 초보 엄마로 정신이 정말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하였던가. 그 전쟁통 속에서도 남편은 그 병원 책꽂이에 꽂혀 있는 만화 삼국지 15권을 완독하셨고, 나는 그 사이 간호사 선생님, 병실 청소해 주시는 분들과 친해져서 근황 토크로 분주했다. 그 사이 순둥이 아들은 그 긴 금식의 시간도, 매일 밤낮으로 우는 아이들의 소리가 끊이지 않는 소아 병동 5인실에서의 시간도 잘 버텨주었다.
당시에 찍어놓은 사진을 뒤적거리는데, 아기 똥 사진이 참 많다. 비위가 약하신 분들을 위해 사진을 넣지는 않았으나 그 땐 아이 똥구멍 바라보고 똥 사진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수술 후 하루에도 7~8번씩 대변을 보는 아이를 위해 매번 씻기고, 똥 묻은 옷을 삶으며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몰랐지만, 항문으로 배변을 보는 어쩌면 당연한 일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대단히 감사했다. 그리고 지금도 난 내 자식 똥이 그렇게 예쁘다.
시간은 흘러 1년의 육아휴직 기간이 끝이 났고, 복직이냐 퇴사냐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일도 그만 둘 수 있고,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철학이 있다던 그 마음은 현실 육아 후 대단히 달라져 있었다. 큰 아이를 키우며 이 육아의 끝이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누군들 소질이 있을까만은 내가 대단히 육아에 소질이 없다는 것도 깨닫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리고 복직을 결심하는데는 무엇보다 남편의 권고가 컸다. 산후 우울증도 겹쳐 짜증과 눈물이 많아진 나에게 일터는 탈출구였다.
동거가 시작된 시기에 어머니는 예순 다섯으로 적지 않은 연세셨고, 그 연세에 육아를 부탁드린다는 것이 며느리로써 몹시 죄송한 일이었다. 그런 어머니께서 기꺼이 아이를 맡아 주시겠다 하셨고, 시어머니와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주변의 염려 가득한 이야기를 뒤로 동거를 시작하였다.
우리 시어머니는 참 대단하신 분이다. 남편 위로 누나가 셋이 있고, 큰 누나는 자식이 셋, 둘째 누나는 미혼, 셋째 누나는 자식이 둘이 있다. 그러니까 외손주가 총 다섯인데, 이 외손주 다섯의 탄생 후 모두 어머니께서 산후조리를 해주셨다. 그 중 큰 시누이의 둘째 아이는 어머니께서 시골에서 만 3년을 키우셨다. 내가 어머니께 아이를 부탁하는 그 시점에는 셋째 시누이의 아들 둘을 주말마다 올라와서 봐주고 계시는 시기였다. 그리고 드디어 막내 아들의 아들을 봐주실 차례가 된 것이다.
나에게는 죄송한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계획이 다 있으셨다. 지금도 가끔 어머니는 “나는 너네 집에 와서 놀다 가서 이제는 일 못한다.”는 말씀을 하신다. 황혼 육아를 논다라고 표현하시다니! ‘놀았다’의 정의가 사뭇 신기하기도 하지만 어머니의 젊은 날의 고된 시절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저 다짐을 당시에는 꽤 쎄게 했다. 마치 십계명의 한 구절처럼 어머니와 살기 위해 ‘제 1 계명은 서운한 말을 하지 않는다’를 마음 속에 새긴 것과 같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따라 출애굽 한 것처럼 어머니로부터 육아 탈출이 된 터이니 어머니 말씀을 잘 따라야지 다짐했다. 그리고 그 다짐이 얼마나 헛된 것이며, 잘못된 신념으로 인해 이상한 싸움의 시작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로부터 몇 년이 더 지나야 했다.
어쨌든 여러 우려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첫 일 년 우리 둘의 케미는 꽤 좋은 편이었다. 우리 둘은 우렁각시처럼 서로를 챙기기에 바빴다. 부부로 따지면 허니문 단계 즈음 되었던 것 같다. 난 육아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았기 때문에 초저녁에 어머니가 잠이 드시면, 집안 곳곳을 쓸고, 닦고 하였고, 시시각각 어머니가 필요할 것 같은 화장품, 옷, 신발 등을 사다 날랐다. 어머니는 내가 아침 식탁에서 오이를 두 개라도 집어먹는 것을 보시면, 삼시 세끼 오이를 꼬박꼬박 챙겨 주실 만큼 세심하셨다. 어머니 덕분에 아침, 저녁으로 따뜻한 찌개에 맛난 밥을 먹으며 편히 직장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가 자랑처럼 들릴 수 있겠으나 허니문에는 콩깍지가 씌여 서로의 좋은 점만 보이는 단계이니 모쪼록 읽으시는 분들이 불편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찐 동거 이야기가 곧 시작될 것이다. 아이를 돌봐주시는 어머니가 계시니, 회사 끝나고 종종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도 생겼다.
얘들아, 난 다시 태어나도 우리 남편 만나야해. 우리 시어머니 또 만나야 하거든
라고 내가 했단다. 둘째 낳고 내가 우리 시어머니 때문에 이게 힘들다, 저게 힘들다 하소연을 하고 있으니 대학 동기가 말해준다. 너 큰 애 낳고 저런 소리 했다고. 깔깔깔 큰 소리로 웃음이 터졌다. 그래, 내가 어머니랑 살던 첫 해 그런 소리를 했었던 것 같다.
비단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매주 주말 시아버지가 계시는 홍성을 내려갔다 올라오는 일요일 밤이면 우리 가족은 어머니를 뫼시러 용산역을 갔고 석양을 바라보며 한강 다리를 건너던 어느 날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평생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보는 것은 처음이구나.
물론 저 이야기를 우리 시어머니가 지금도 하실지는 잘 모르겠다. 최근에 들어본 적은 없다. 여튼 살면서 커피숍이라고는 딱 한 번 가보셨다는 어머니 모시고 서울 시내 곳곳으로 좋은 커피숍 뫼시고 다녔고, 아메리카노보단 카페모카를, 삼겹살보단 회를 더 좋아하신다는 취향도 딸보다 며느리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매번은 아니여도 월급날이면 좋아하시는 회전 초밥, 한정식, 추어탕, 장어 등 맛있는 것도 많이 사드리려 노력했다.
무엇보다 어머니는 매월 25일 꼬박 꼬박 들어오는 생활비가 육십 평생 처음 받아보는 월급이셨기에 더 좋으셨던 것 같다. 내가 시어머니하고 살면서 잘한 것이 그리 많지 않지만, 딱 하나 자부하는 것은 5년의 기간 동안 둘째를 낳으러 가서도, 내가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으로 입원해서도 어머니 생활비는 밀리지 않고 챙겨드렸다는 것이다. 본디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있어도 월급날이면 또 슬그머니 집어 넣는 것이 직장인의 심리 아닐까. 어머니도 육아의 힘든 순간마다 작지만 소소한 기쁨이실텐데 그 기쁨만큼은 꼭 챙겨드리고 싶었다.
어머니는 MBTI 성격 유형 중 ISFJ이시다. ISFJ는 내향적 감각기능(Si)을 주기능으로 사용하여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정보들을 내적 저장 창고에 차곡차곡 저장해 놓는다. 특히 외향적 감정(Fe)을 부기능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사람과 관련된 이전의 기억을 노력하지 않아도 상당히 잘하는 유형이다. 그래서 우리 시어머니께서는 임신했을 때 시아버지가 복숭아를 사주지 않으셨다는 40년도 더 된 이야기를 어제 이야기처럼 맛깔나게 전해주신다. 내가 시어머니와 산다고 하였을 때, 아버님께서 ‘너희 시어머니는 한 번 아니다라고 생각하면 뒤돌아보는 성격이 아니니 둘이 사이가 나빠지지 않게 너가 잘해라’라고 당부하신 것도 아버님이 MBTI는 모르셔도 어머니 성격을 잘 묘사해주셨던 부분이었으리라. 그래서 더욱 어머니께 서운하거나 섭섭한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겠다 다짐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그 순간 며느리한테 들었던 서운한 말 때문에 상처로 남게 해드리지 말아야지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참 아무것도 몰랐구나 싶다. 섭섭하게 만들지 않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화해할 줄 아는 것이 관계의 기술이라는 것을 그 때는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