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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링스팟 Sep 17. 2021

<시어머니편>잔소리.
하나부터 열까지 다 널 위한 소리

현실 육아 시작. 역할 부자, 갈등 부자의 인생공부


부자(富者) [명사]

1. 재물이 많아 살림이 넉넉한 사람.

2. 그것이 많은 사람을 나타내는 말.     


아이를 낳고 복직을 하며, 부자가 되었다. 재물이 많아 살림이 넉넉한 그 ‘부자’는 아니였다. 대신 엄마이자 며느리이며, 아내이고 팀장인, 딸이고 동생이며 누군가의 친구인 최소 7개의 역할을 동시 수행해야 하는 역할 부자가 되었다. 역할 부자가 되고 나니, 갈등 부자를 겸임해야 했다. 그렇게 인생을 살며 가장 많은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서른 즈음에 치열한 인생 공부가 시작된다.      



콩깍지 끝. 

현실 육아 시작. 역할 부자, 갈등 부자의 인생공부

잔소리하나부터 열까지 다 널 위한 소리   

  

으악     


나의 찐 동거는 예상치 않게 찾아온 둘째 아이의 출산과 맞닿아 있었다. 큰 아이가 워낙 오래 기다려 생긴터라 이렇게 빨리 둘째가 생길 줄 몰랐고, 큰 애 낳고 복직한 지 이제 겨우 넉 달이 되던 시점인데다 남편과의 불화로 사내마내 소리를 하고 있었던 시절이라 임신테스트기의 두 줄을 보고 억소리가 났다.      


당시 다니던 회사에서는 50년 역사 상 둘째를 낳고 육아휴직에 다녀온 경우가 딱 한 번 있었다는 이야기를 풍문으로만 들었기에 다시 또 휴직 이야기를 꺼낼 수 없어서 임신 5개월이 될 때까지 비밀리에 다녔다.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만큼 배가 나오기 시작 할 때 한 육아휴직에 대한 협의에서는 큰 아이 때처럼 1년은 어려우니, 출산 휴가 3개월 사용하고 그 후에 다시 이야기 하자는 답변을 받았다.      


이른 복직을 염두하고, 출산 휴가 기간 동안 어머니와 함께 지내기로 하였다. 아동학 전공자로써 주양육자가 자주 바뀌지 않도록 하고 싶었고, 어머니랑 동거한 지 대략 반 년 정도 되어 허니문 단계를 지나고 있었던 시기라 어렵지 않게 결정했다. 그리고 그 어렵지 않게 한 결정으로 매일 매일 어려운 인생 숙제를 풀어야 하는 과제의 늪으로 들어가게 된다.      


내가 왜 애 하나 키울 때 힘들다고 했지?’     


저 소리를 둘째 낳고 입에 달고 살았다. 큰 아이는 순한 기질로 갓 태어나서 노후된 앰블런스를 타고 한 밤 중에 병원을 찾아 해매던 고요한 그 밤에 잘도 잤다. 주변에서 아이를 먼저 키운 선배 맘들이 큰 아이를 보면서 이런 아이는 열도 키우겠다고 하면 무슨 소리인지 잘 몰랐다. 나야 첫 아이였으니, 아이는 원래 배고플 때 밥 주고, 졸릴 때 재워주면 그렇게 크는 것 인줄 알았다. 까다롭기 대회가 있으면 1등을 할 것만 같은 둘째를 낳고서야 얼마나 편히 육아를 했는지 깨달았다. 애가 하나였다가 둘이 되었으면, 두 배만 힘들어야 하는데, 왜 세 배 아니지 네다섯배는 힘든 것인지 몰랐고, 누가 둘째를 낳는다고 하면 보따리 싸 들고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지금은 둘째 안 태어났으면 어떡할 뻔 했냐는 소리를 입에 달고 있지만, 둘째가 만 두 돌이 되기까지는 내 인생 최고의 격변기를 살아야 했다.      


우리 둘째는 소위 말하는 등센서를 장착하고 태어나서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있지를 않았다. 등이 바닥에만 닿으면 돌고래 소리 같은 비명으로 울어대는 바람에 이웃집에서 아동학대로 신고가 들어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낮에는 시어머니 품 속에서 밤에는 내 품 속에서 지내야 했다. 하루 토탈 2시간도 바닥에 누워있지 않는 아이 덕분에 아기띠하고 화장실에서 볼 일도 볼 수 있는 능력도 생겼다. 그 때 큰 아이는 겨우 23개월이였고, 큰 소리 한 번 안 듣고 키웠던 아이에게 동생을 위험하게 한다는 이유로 잦은 제한과 화를 내야 하는 내 자신이 너무 싫었다.      




라떼는 말이다 애 낳고 삼 일 만에 밭일하러 나갔단다.”     


나는 본디 아침잠이 많다. 저혈압 때문에 새벽에 깨면 하루 종일 머리가 멍한 상태가 지속 되어 가능한 아침에 충분한 수면을 취하며 살아왔다. 그런 나에게 신생아를 양육하며 경험한 수면 부족 현상은 육아의 최고 난제였다. 반면 시어머니는 아침형, 아니지 ‘새벽형 인간’이셨다. 8시 조금 넘긴 초저녁에 주무시면 새벽 4시에부터 일어나 밥을 하고, 청소를 하시며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시는 부지런한 분이셨다.      


시어머니는 자식 넷을 모두 집에서 낳고 산후조리라는 것도 없이 삼 일 만에 나가서 밭일을 하셨다고 한다. 그런 시어머니가 아이가 자면 낮이고 밤이고 같이 누워서 잠만 자는 며느리가 못마땅할 수 밖에 없으셨으리라. 어머니는 까다로운 기질의 둘째를 품에 안고 계실 때면 ‘너가 조리원에서 애만 끼고 있어서 얘가 이렇게 까다롭다’고 한탄하셨다. 큰 아이 키우면서는 잦은 병원 생활로 산후 조리 한 번 제대로 못했고, 둘째는 조리원 겨우 2주 다녀 왔다 생각한 나로써는 어머니의 한숨이 돌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큰 아이 낳고는 어머니와 마주칠 일이 크게 없었다. 새벽같이 일어나시는 어머니는 초 저녁에 주무시는지라 퇴근해서 내가 아이를 돌보면 됐기 때문에 하루에 많이 봐야 한 두시간 내외의 시간을 같이 보냈다. 둘째를 낳고서는 24시간을 어머니와 함께 아이 둘을 같이 봐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우리 둘은 서로 다른 문화 차이, 세대 차이에 적잖이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가장 당황스러웠던 것은 시어머니의 잔소리였다.      


감자가 집에 있는데 감자를 또 사오면 어떻하냐
더운데, 왜 두꺼운 긴팔을 입히냐, 집인데 왜 새 옷을 입히냐
손톱을 왜 밤에 깎냐
국을 왜 먼저 가져다 놓으냐
후라이팬을 왜 그렇게 놓느냐
애 머리를 양갈래로 묶어야지, 왜 하나로 묶느냐
이 신발은 버리지 왜 여기에 두냐 
큰 집 올라갈 때는 긴 바지로 갈아입고 가거라     



뭐 이 정도면 그냥 랩퍼가 아니실까 싶을 정도로 눈을 뜨면 잔소리 알람과 함께 하루를 시작해야 했다. 당시에는 내 발뒤꿈치도 미운가보다 싶었다. 설마 어머니께서 그렇게 잔소리를 쉬지 않고 하셨을리 없건만 그 때는 저 마음이 내가 느끼는 진심이었다. 뱃 속에서부터 머리 크기가 컸던 큰 아이는 걸음마 할 때부터 자주 넘어지곤 했는데, 아이가 넘어질 때마다 어머니께서는 “너가 백일 때 떡을 안 돌려서 애가 넘어진다.”는 몹시 신선한 인과관계를 제시하셨고 그 말도 자주 듣다 보니 진실처럼 느껴져서 둘째는 백 일 전에 열감기로 병원에 입원해 있던 상황에서도 떡을 맞춰서 돌렸다.      


친정에서 나는 ‘자유방임주의’ 모토 아래 자랐고, 잔소리를 들어본 적이 많지 않았다. 스무 살 때부터는 심리적, 경제적으로 독립을 한 터라 내가 주도적으로 무엇을 결정하고 실행하고 추진하는 것에 익숙해 있었기에 더욱 잔소리에 취약할 수 밖에 없었다. 허나 나의 시댁은 사랑의 언어가 잔소리였고, 이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날 위한 소리였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시는 어머니에게는 멈출 수 없는 훈화 말씀 이셨다.      


살면서 가장 많이 받아본 잔소리에 내가 한 대처 방법은 입을 다물고 있는 함구(緘口)였다. 속이 시끄럽고 한 켠으로는 억울한 부분도 많았지만, 어머니와 동거하며 쎄게 결심했던 ‘어머니 섭섭하게 만들지 않기’ 때문에 사사건건 토를 달면 어머니가 속상하실까봐 걱정이 앞섰다. 그 속앓이는 슬픈 표정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었고, 어머니는 며느리의 속을 알 수 없으니 무언가 불편한 분위기 속에 심리적으로 점점 더 멀어져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인이 잔소리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셨기 때문에 그 랩은 계속해서 틀어 두셨다.      


나의 적절하지 못한 대처 방식 때문에 중간에서 가장 난처한 사람은 어머니의 아들이자 나의 남편이었다. 남편 입장에서는 퇴근하고 들어오면 알 수 없는 쎄한 분위기가 집안을 감싸고 있었고, 아내가 어떤 날에는 안방 한 구석에 처박혀서 울고 있거나 또 어떤 날에는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고 있으니 가시방석이었으리라. 시어머니한테는 섭섭한 소리 안하겠다고 함구하고 있으면서 남편 퇴근 후에는 그날 하루의 뒷담화가 시작되었으니 본인 엄마를 같이 욕할 수도 편들 수도 없는 아들이자 남편으로써 참 힘들었을 것이다.      


이 전쟁 같은 동거는 둘 째 출산 4개월 후, 직장으로 복직하면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찐동거 4개월 이후부터는 어머니가 잔소리를 하루에 한 개만 하셔도 내가 이 전보다 더 격하게 반응하면서 미해결된 과제로 남아있게 되었다.      


아이들은 엄마가 챙겨야지시어머니한테만 맡겨놔서 되겠니?”     


시아버지의 저 사랑의 말씀은 1차 동거위기를 촉발하게 된다. 당시 복직해서 팀장으로 승진한 후, 동시에 진행하고 있는 외부 프로젝트만 3개가 넘었고, 새로운 팀원들을 채용해서 전사적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도 운영하던 시기에 두 아이가 동시에 장염이 걸렸다. 먼저 큰 아이가 설사를 해서 동네 소아과에 갔다가 밤에 고열이 나기 시작해 야간 응급 소아과를 방문했었고, 열이 3일 째 떨어지지 않아서 아이가 수술했었던 대학 병원 응급실만 두 차례 방문했었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출근은 해야 했기에 아침에 분주하게 챙겨서 출근하는 길에 시아버지께서 전화가 와서 말씀하시길 이 병원이 안되면 저 병원도 가보고 해야지 아이들을 시어머니한테만 너무 맡겨두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셨다.      


출근하는 버스 안에서 펑펑 울었다. 서러웠다. 무엇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는지 모르는 채 낮에는 회사로 밤에는 응급실로 날아다니면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잘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원펀치를 맞아 떨어져 K.O 당한 기분이었다. K.O 당해서 그냥 누워있으면 좋으련만 또 일어나서 아이 둘을 입원시켜야 했다. 아이 둘 입원시키면서 급하게 이 짐, 저 짐 다 실어서 병원에 왔는데 시어머니께서는 이 짐, 저 짐을 다 들쳐보시며 ‘이 것은 뭐하러 챙겨 왔냐, 옷은 또 왜 이리 많이 가져 왔냐, 기저귀는 왜 안가져 왔냐, 젊은 사람이 정신이 없어서 되겠냐’ 하시며 훈화 폭격을 시작하셨다.      


그 와중에 어리석게도 시어머니께는 함구 전략만 구사하고 남편에게 선전포고 하였다. 지금 이 순간 부터 나는 시댁으로부터 오는 모든 전화와 방문은 받지 않겠으니 알아서 처리하라 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시어머니를 보기만 해도 숨 막힐 것 같으니 병원에는 제발 오시지 말라고 전하라 하였다.      


이 전 일을 회상하며 글을 쓰다 보니 남편에게 참 미안하다. 지금은 그 상황에서 시부모님으로써 며느리에게 할 수 있는 말처럼 느껴지는데 그 때는 둘째 낳고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육체적, 심리적으로 아직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팀장이란 직책도, 엄마라는 역할도 잘 해내고 싶다 보니 예민해져 있었던 것 같다. 또 갈등에 대처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가 있어야 훨씬 더 유연해질 수 있다는 것도 이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서야 깨달은 바이기에 그 때 그 시절 미숙하게 대처한 나의 모습을 오롯이 버텨준 남편에게 참 고맙다.



어떡하니!”     


퇴근 후, 문 앞에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자면 아이들이 문 뒤에서 “엄만가? 아빤가?”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은 이 때랑 잘 때가 제일 예쁜 듯. 강아지처럼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의 생각하며 여느 때처럼 문을 열었던 그 날은 근심스러운 표정의 어머니도 함께 서 계셨다. 어머니와 딸이 동시에 사건의 전말을 소개해 주는 바람에 지금도 정확히 딸이 어떤 경위로 얼굴에 화상을 입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당시에 파악된 것은 식탁 위에 올려둔 후라이팬이 사건의 단서라는 것과 화상 후 응급 처치는 되지 않았다는 점, 사건이 발생한 지 아직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병원 갈 정도는 아닌 것 같아 일단 퇴근 할 때까지 기다리셨다고 상황을 설명하시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일단 바로 아이를 들쳐 업고 야간 소아과로 향했다. 급한 마음에 택시를 타고 찾아간 야간 소아과의 의사 선생님께서는 화상은 전문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하였다. 화상 병원 전문의 선생님께서는 상처가 생각보다 깊으니 최소 열흘은 매일 와서 소독을 받아야 하고, 그 뒤 일 주일은 경과를 보자 하셨다.               

        

긴급하게 응급 처치를 해 놓고 집으로 돌아오다 보니 사람들의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솔직한 심정으로 가장 먼저 들어온 마음은 내 마음, 원망이었다. 왜 어머니는 식탁에다 뜨거운 후라이팬을 올려두셨을까, 후라이팬을 올려두고 왜 자리를 비우셨을까. 나는 왜 좀 더 조심해야 한다고 아이를 가르치지 못했을까, 회사에서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왔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떠올린 마음은 어머니의 자책하는 마음. 내가 좀 더 잘 봤어야 하는데 하며 말 끝을 흐린 채 병원으로 향하는 나와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망울 속엔 손주를 향한 미안함과 더 잘 돌보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으셨다. 그리고 보인 아이의 마음. 당시 갓 36개월 지난 시기에 미안해 하는 할머니와 놀란 엄마 사이에서 쫑알 쫑알 설명하고, 의젓하게 치료받으며 자신 때문에 발생한 일에 대해서 태연히 책임을 지고 있었다.      

아이는 자신 때문에 발생한 일에 태연히 책임을 지고 있었다. 


원망 (怨望), 못 마땅하게 여기어 탓하거나 불평을 품고 미워함.      


원망은 벌어진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다. 일어날 불행을 예방할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린 쉽게 원망한다. 마치 정이의 화상 앞에 어머니를 향한 내 마음처럼 말이다. 원망의 씨앗이 내 손에 쥐어 졌을 때 땅에 심고 가꿀 수도 있고, 잠시 쳐다 보고 내다 버릴 수도 있다. 다행히도 난 그 원망을 잠시 쳐다 보고 내다 버렸다. 딱 한 발자국만 물러서 정이가 화상을 입던 그 순간에 어머니가 아니라 내가 있었다면, 내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 순간 듣기 싫은 말과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를 떠올려 보니 원망할 수 없더라.      


그 뒤로 정이는 매일같이 병원을 다니며 소독하고 치료를 받았다. 상처가 거의 아물어 갈 즈음 치료받던 병원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왔는데, 당일 진료를 받겠냐고 물어 입구에서 바로 돌아 나왔다고 한다. 전화로 상황 공유해주는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근처 대학병원 내 화상전문진료과를 알아보았다. 전원이 가능한 지 문의하자 해당 병원에서는 코로나19 음성판정확인서가 있어야 진료가 가능하다 하였다. 무료선별진료소를 가기 위해서는 시청까지 가서 그 겨울 그 추위에 긴 줄을 대기해야 했다. 대학병원 담당자에게 우리는 코로나19 확진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바로 입구에서 나왔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다 설명하였지만 담당자는 시큰둥 한 목소리로 알아보고 다시 연락을 준다 하였다. 일단 그 날 진료는 받지 못했고, 퇴근 후 나는 남편에게 작전 계획을 설명하였다.      


“여보, 나에게 계획이 있어. 자, 1안. 진료 받던 병원으로 다시 간다. 2안. 대학병원 담당자를 다시 설득해본다. 3안. 코로나19 진단검사를 내일 받고 결과를 기다려서 대학 병원을 간다. 각 대안은 장, 단점이 존재하는데…….”     

진지하게 작전 설명 중인데, 남편은 반 즈음 눈이 감겨 있는 채로 누워 답한다. “여보, 일단 내일 대학병원 담당자가 아침에 전화 준다고 했으니까 그 뒤에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그거 꼭 지금 생각해야 해?” 하더니 그 새 잠이 든다. 허허. 어찌 전략도 안 세웠는데 잠이 올꼬 싶었는데, 다음 날 아침 대학병원으로부터 진료 받으러 오라는 전화를 받고 남편의 삶의 방식에서 지혜를 배웠다. 자꾸 사소한 것까지 통제하려 들지 않고 흘러 가는 대로 두고 그 흐름 가운데서 대처 능력을 키워가는 것. 정이의 화상 치료는 그 뒤로도 6개월은 지속 되었지만, 그렇게 나의 삶에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고 지금은 흔적조차 없이 새살이 솔솔 잘 돋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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