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이상형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이 글을 처음 시작하며, 이 글의 끝이 어떻게 끝날지 궁금하다 하였는데, 초고의 마지막 파트를 쓰는 시점이 왔다는 것이 신기하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던가. 8월 13일 육아 에세이 작가님들과 발대식을 하고 초고 완성까지 딱 두 달 걸렸다. 물론 초고를 다 쓴 파트는 시어머니편 밖에 없다. 바쁜 엄마들 데려다가 숨 넘어가게 할 생각은 없기에 나머지 3편은 각자의 속도에 따라 초고를 써 갈 생각이다.
더 쓰고 싶은 이야기는 가득하지만, 4명의 작가가 함께 쓰는 글이기에 처음 계획했던 80페이지 내외에서 글을 마무리해야지 싶다. 시어머니께 자서전을 써 드릴 테니 어머니 기록하고 싶으신 연대기랑 사건들 녹음 떠달라 하였는데 어머니께서도 속도를 내지 않으셔서 10년의 시간 동안 며느리의 눈으로 본 우리 시어머니를 소개하며 이 글의 마지막을 기록하고자 한다.
결혼 전 시어머니와 처음 만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시어머니께서는 "니들만 좋으면 됐다." 저 말씀만 딱 3번 하셨다. "어머니, 저 어떠세요? 마음에 드세요?"라고 당차게 물어보는 며느리의 질문에 시어머니께서는 수줍게 작은 목소리로 저 말씀만 하셨다. 내가 본 시어머니의 첫 인상은 수줍음 많은 소녀의 모습이셨다. 훗날 남편 통해 들은 이야기는 시부모님께서는 며느리의 첫 인상으로 구김살 없이 사랑 많이 받고 자란 것 같다 하시며, 남편이 꽉 잡혀 살까 걱정하셨다 한다. 우리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된다.
시어머니는 장 씨 집안의 둘째 딸로 태어나셨다. 위로 큰 언니가 있고 7년 만에 시어머니가 태어나셨다. 그 뒤 3년 뒤에 아들이 태어나고, 그 뒤 몇 년 뒤에 아들이 또 태어났다. 2남 2녀 중에 둘째로 태어나 남동생을 봤다는 이유로 아버지께 예쁨 받고 크셨다 했다. 시어머니의 생년월일은 정확히 모른다. 주민등록상 53년도 생으로 등록되어 계시나 태아 사망률이 높던 당시에는 1~2년 늦게 출생 신고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어서 2년 늦게 출생 신고하셨다니 51년도에 태어나 지금까지 70 평생을 살아오셨다.
20대 초반 시아버지를 선 자리에서 딱 한 번 보고 결혼하셨다. 왜 결혼하셨냐 물어보니 잘 생기셔서 결혼하셨다고. 잘 생긴 전 씨 집안 둘째 아드님과 결혼하신 시어머니는 표현에 의하면 ‘노예 살이’ 하셨다. 9남매의 맏이는 아니셨지만 맏이 노릇을 하시는 시아버지를 남편으로 두신 덕에 맏며느리 역할까지 다하며 시누이들 학교 뒷바라지도 하고, 시동생들 사업 뒷바라지하시느냐 살림을 펼 새가 없었다. 나의 남편에게 어릴 적 어머니랑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무엇이냐 물어보니 없단다. 어린 시절 자신이 기억하는 어머니는 태양 볕에 밭일하시는 어머니의 모습밖에 없다고 했다. 하루는 고모들이랑 사촌들이 버스 대절해서 바닷가를 놀러 가는데 본인 어머니만 밭일을 하고 있어서 어머니 붙잡고 엉엉 울며 어머니도 좀 놀러 가시라고 했는데도 그렇게 묵묵히 일만 하셨다 했다.
“여보, 왜 울어?”
“엄마 보고 싶어서.”
“뭐야, 누가 보면 어머니 돌아가신 줄 알겠어. 저 방 문 열면 어머니 주무시고 계신 데 가서 보고 와”
마흔이 다 된 남편은 아주 가끔 본인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훔칠 때가 있다. 이럴 때 아내가 공감도 해 주면 참 좋으련만, MBTI의 성격유형 중 사고(Thinking)를 선호하는 나는 공감보단 해결책 제시가 빠르다. 나중에 후회하기 전에 더 많이 사랑한다 표현해드리라 질책할 뿐 솔직히 가끔 어머니 생각에 울고 있는 남편을 이해하기 어렵다. 전 씨 집안으로 시집오신 시어머니는 결혼 후 딸 셋을 낳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은 본인의 자존심이자 자부심이 되셨다. 아들 하나라고 오냐오냐 키우면 밥벌이 제대로 못할까 싶어 포근히 한 번 안아준 적은 없지만 더없이 소중한 아들로 키우셨다.
그리고 금지옥엽 키운 그 아들은 가씨 집안 막내딸과 결혼을 한다.
“엄마, 맨날 그렇게 아버지 흉봐서 뭐 할 거야. 다른 남자 만나서 살았으면 행복했을 것 같아?”
시어머니의 둘째 딸이자 나의 시누이 언니가 하루는 엄마에게 물었단다. 다시 태어나면 어떤 사람과 결혼하고 싶냐고. 시어머니께서는 지금보다 좀 더 다정한 사람과 만나 살아보고 싶다 하셨다.
“엄마, 다정한 남자가 어딨어? 남자들 다 똑같지 뭐. 엄마 주변에 다정한 남자 본 적 있어?”
“아니다. 있다야.”
“누구?”
우리 아들
저 이야기를 시누이 언니한테 듣는데 너무 크게 깔깔 웃었다. 그러게, 우리 시어머니께서는 이상형을 남편으로 못 두고 아들로 두셨으니 며느리가 얼마나 부러우셨을까.
“어머니, 아들 잘 키워주셔서 좋은 남편이랑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언젠가 시어머니랑 맥주 한 잔 기울이다 저 이야기를 해드렸더니 몹시 흡족하신 표정으로 아무 말씀하지 않으셨다. 우리 시어머니께서는 마음에 쏙 드는 말을 들었을 때는 묵묵히 듣고만 계시는데 살면서 딱 두 번 있다. 저 말했을 때랑 내가 돈 많이 벌어오겠다 했을 때.
어쩌다 보니 이 글 속에 남편 흉보는 이야기가 많아지긴 했지만, 솔직히 시어머니께서 나를 부러워하시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다정하기 대회에 내가 심사위원으로 있을 수 있다면 우리 남편 1등 줄 수 있다. 나의 남편은 삼십 대 중반이 넘어가는 아내에게 아침저녁으로 예쁘다 말해주고 큰 아이 임신했을 때부터 만 5년을 매일 아침 차로 출근시켜준다. 또 미주알고주알 회사 돌아가는 사정을 다 이야기해 주는 그런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꿈을 응원해주고 지원해주는 지금은 나의 좋은 투자자이기도 하다.
시어머니의 이상형은 며느리가 데리고 살고 있으니 모쪼록 시아버님과 남은 여생을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으련만, 우리 시어머니께서는 시아버지께 섭섭했던 기억, 속상했던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남겨 두셔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회만 닿으면 최선을 다해 후회하고 계신다. 특히나 시댁 식구들에게 퍼주기만 한 삶에 대해서 대단히 속앓이를 하시는데, 정작 속상하게 한 당사자들에게는 직접 한 번 서운하다 표현해보지 못하셨다.
그런 시어머니를 곁에 두고 보려니 너무 안타까워 동거의 기술 편 다음으로 <화해의 기술>을 기획해볼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은 인생이신데, 지나온 날들을 후회하며 사는 것보다 과거를 용서해주고 화해할 수 있다면 시어머니의 인생이 지금보다 행복해지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시어머니와 함께 산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나에게 참 많은 영향력을 주고 계신 우리 시어머니가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그래서 어젯밤에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한천 가루와 팥앙금을 주문해 드렸다. 과거를 용서하고 미워했던 사람과 화해하라는 엄청나게 거대한 일을 하시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저 잔뜩 따다 놓은 밤을 가지고 양갱이를 만들어 보고 싶어 하시는 시어머니를 위해 양갱이 만드는 레시피와 함께 재료를 주문해 드린 것이다.
이 동거의 끝이 해피 엔딩일지, 세드 엔딩일지 잘 모른다. 이 책의 저자가 ‘나’이기 때문에 그 끝도 내가 어떻게 적어 내려가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지금은 과거형이 아닌 현재 진행형이기에 시어머니와 함께하는 이 순간 소소하지만 확실한 일상의 추억을 만들어가며 나는 오늘도 이렇게 함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