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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링스팟 Oct 13. 2021

<시어머니편>기억력보다 망각하는 능력을 단련하기

신이 준 최고의 선물, 망각

시어머니와 잘 사는 노하우(Know-how) 네 번째 기술. 잊어버리기


신이 준 최고의 선물을 반품하시겠습니까?

망각의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살며 잘 살기 위해, 맞춰서 적응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들을 시도했다. 내가 쓴 글의 워드 클라우드를 그린다면 아마 가장 크게 '잔소리'가 들어가 있을 것이다. 태어나서 가장 단기간에 가장 많은 훈화의 말씀을 듣게 되면서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했고 그중에서는 도움이 된 방법도 도움이 되지 않은 방법도 있었다. 그 시행착오 중 하나가 시어머니의 잔소리를 한 땀 한 땀 기록해 둔 것이었다.

시어머니편의 키워드를 워드 클라우드로 표현해보았다. 압도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키워드는 잔소리



한 땀, 한 땀 잔소리를 기록하다.


아침 출근길은 가장 분주하고, 가장 많은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나의 출근도 준비해야 하면서 아이들의 등원도 함께 준비시켜야 하는데, 매 순간 시어머니께서는 나의 소중한 동지이자 적군 역할을 동시 수행하셨다. 시어머니께서 아이들을 쫓아다니시며 한 숟가락이라도 밥을 더 먹여주시는 사이에 나는 화장을 한다. 아마 시어머니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적정 체중으로 잘 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옷을 입히고 씻기는 그 순간에는 또 반대편에서 저격을 시작하신다. 애 옷을 그렇게 입히면 어떡하냐 날이 얼마나 더운데 그런 옷을 입히냐, 날이 얼마나 추운데 그런 옷을 입히냐, 치마 밖으로 바지가 나오는데 안 예쁘다 등 시어머니의 참견과 잔소리 그 중간 즈음에서 꼭두각시처럼 움직일 때가 다수였다. 아이들을 옷 입히는 것으로 씨름하는 정도면 괜찮지만 시어머니께서도 피곤하시거나 힘드신 날에는 날이 선 표현들로 공격하실 때가 있었다.


시어머니께서 가슴에 박히는 표현을 사용하신 날에는 출근하는 날에는 숨이 막히도록 힘이 들었다. 출근길에 혼자 울기도 했고, 남편한테 전화해서 하소연하기도 했다. 어떤 날에는 나에게 보내는 카톡에다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시어머니의 어떤 표현에 속이 상했고, 어떤 느낌을 받았으며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지를 적어두었다. 그러고 나니 출근하는 길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누구한테 말한 것도 아니고 나 자신에게 카톡을 보내 두는 것만으로도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 좋은 방법이라 생각이 들어 시어머니께서 섭섭하게 한 말 들, 서운하게 한 말들을 줄줄이 기록해 두었다. 그러다 가끔씩 카톡을 들춰보면서 그때 화나고 섭섭했던 그 순간의 감정들을 다시 떠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아주 가끔씩은 친구들과 만나 내가 써둔 카톡을 읽어가며 우리 시어머니는 나한테 이런 말씀도 하셨다면서 기억을 떠올리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에빙하우스 망각곡선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에 따르면 학습이 일어난 후 20분이 지나면 기억의 절반 가까이가 소실된다. 한 달 정도 뒤에는 학습의 20% 내외만 남게 된다. 이러한 논리로 인해 학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학습 후 10분 이내 복습, 하루 이내 복습, 일주일 이내 재학습, 한 달 이내 재학습을 할 수 있도록 학습을 설계한다. 그러면 학습한 내용이 단기 기억에서 장기 기억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신이 준 최고의 선물을 반품하다.


내가 혼자만 보는 톡 방에 글을 올리고 주기적으로 읽고, 그것을 또 누군가한테 인출하는 과정은 시간이 흐르면 잊힐 수 있는 기억을 굳이 되살려 장기 기억으로 넘어가도록 한 행위였다. 시어머니께 섭섭했던 기억을 고이 간직해서 뇌 속에 새겨둔다 한들 과거의 기억에 묶여 현재의 관계를 악화시킬 뿐 도움이 되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시어머니와 함께 살 준비를 하는 사람들에게 몇 걸음 앞서 살아본 사람으로서 편히 사는 방법을 설파하자면, 시어머니에게 섭섭했던 것들은 가능한 타인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말하는 그 순간은 카타르시스가 있다 할지라도 내가 말하는 행위를 통해 기억을 소환시켜 인출하는 행위는 그 섭섭함의 감정을 뇌쇄김하여 더 오래 관계를 어렵게 하는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잃어버리기 & 잊어버리기


불행 중 다행으로 내가 한 땀 한 땀 기록해 둔 어머니의 찰진 잔소리는 새 스마트폰으로 교체하면서 사라져 버렸다. 카톡 대화 백업하는 기술이 있을 텐데 한창 바쁘던 시기에 새 스마트폰으로 바꾸면서 이전 대화까지 백업시킬 정신이 없었다. 이 글을 기획하던 당시에 우리 시어머니의 찰진 이야기들을 찾아보려고 내 카톡에 들어갔다가 나와 나눈 그 대화들을 잃어버렸던 사실에 망연자실하기도 했다. 아, 생동감 넘치는 그 많고 많은 사례들을 한 번에 날려버리다니! 너무 아쉬웠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은 참 다행이다 싶었다. 그 옛날 옛 기억을 소환하면서 눈물 훔칠 뻔했는데, 과거에 매이지 않고 지금 시어머니와 관계에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어머니가 손수 키워 끓여주신 아욱국


어제 올린 글에서 시어머니께서 얼마 전에 아욱을 시댁에 심어두었다는 이야기를 썼는데, 그새 아욱은 무럭무럭 자라 어제 저녁 식사에 아욱국으로 끓여져 있었다. 따끈하게 끓여진 아욱국 한 그릇을 먹으며 시어머니의 사랑을 또 되새기며 현재 우리의 좋은 관계를 쌓아갈 수 있었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현재에 집중하는 것. 현재의 문제는 켜켜이 쌓아두지 않고 표현하여 풀어가는 것. 그것이 내가 시어머니와 살며 배운 관계의 노하우이다.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동거의 기술 <고슴도치 동거법>


하나. 거리두기 : ‘자기 결정권’ 보장을 위한 심리적, 물리적 거리두기 
둘. 그냥 두기 : 잘하려고 하지 마. 그냥 둬. ‘딸 같은 며느리’ 되기 
셋. 표현하기 :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몰라요!
넷. 잊어버리기 : 신이 준 최고의 선물은? 망각!
다섯. 추억 쌓기 : 행복은 강도(强度)가 아니라 빈도(頻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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