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에서 니체와 칸트가 사라졌다
“출판업을 하다 보면 문화예술 분야에 있는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아져.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화의 수준도 무척 높아지지.”
그래서 참 좋았다. 그래서 참 문제였다. 무언가 탈출구가 필요했다.
‘노잼 박정오’, 대학 시절 누군가가 붙여준 별명이다. 예전부터 진지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곤 했다. 좋게 말하면 생각이 깊다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참 지루한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특히 복학 후 책과 글쓰기에 본격적으로 빠져들기 시작하며 이러한 증상은 더욱 심각해졌다. 친구들과의 대화가 점점 재미없어졌다. 나는 좀 더 고상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공자와 소크라테스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데카르트에 대해, 칸트에 대해, 니체에 대해 토론하고 싶었다. 아니면 사회 문제에 대해, 정치에 대해 얘기해도 재밌을 것 같았다. 하지만 3~4학년 공대생들에겐 취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면 여자 이야기가 전부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친구들이 정상이고 내가 이상했지만, 당시 내가 느끼던 결핍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출판사에 들어온 이후 나를 둘러싼 환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대표님을 열심히 따라다니며 술자리에 자주 참석하다 보니, 내가 그토록 꿈꾸던 상황이 조금씩 펼쳐지기 시작했다. 작가, 교수, 문화 기획자, 예술가 등과 자주 만났다. 술자리에서 온갖 얘기들이 오갔다. 철학에 대해, 사회 문제에 대해, 정치에 대해, 문화예술 판에 대해 한바탕 토론이 펼쳐졌다. 일본과 중국이 등장했다.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갔다. 마치 강연을 듣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친구들과 있을 땐 단 한 번도 나누지 못 한 고상한 이야기들이 격렬하게 오가고 있었다. 정말 마음 같아선 메모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었다. 나 역시 말이 적은 편이 아니었지만, 이런 자리에 참석하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듣고만 있어도 이러한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가슴 설레는 일이었으니까!
입사한 지 1년이 지나자 술자리가 예전만큼 설레진 않았다. 물론 여전히 알차고 의미 있는 이야기가 오갔고 배울 점도 많았지만, 아무래도 내 업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작가와 이야기하다 보면 아무래도 다음 작품 집필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게 된다. 문화 기획자와 이야기하다 보면 회사와 함께 해 볼만 한 문화기획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런 책 내보자, 이런 행사 만들어 보자는 등 얘기가 오가다 보면, 이곳이 술자리인지 회의 자리인지 구분이 잘 안 갈 때가 많았다. 피로감이 점점 축적되기 시작했다.
*
- 야, 나 이번 주 금요일에 부산 간다. 술 먹자!
C의 카톡에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다행히 그날 다른 약속이 없었고, 울산에서 퇴근 후 넘어온 친구와 오랜만에 만났다. 특히 둘이서 만나는 건 정말 몇 달 만이었다. 대학 시절 내가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이야기를 유난히도 많이 했던 C는 연봉이 무척 높은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다. 비싼 차를 끌고 왔다. 옷을 멋지게 차려 입었다. 손목에 삐까뻔쩍하는 시계를 차고 있었다.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같이 도서관에서 밤새 공부하며 컵라면을 먹던 사이였는데, 기분이 묘했다. 그래도 뭐 각자 선택한 길을 걸어가는 거니까 부럽다거나 하진 않았다. 아니, 사실 돈이 많은 건 조금 부럽긴 했다. 물론 지금 내 일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지만.
C와 술 한 잔을 하다 보니 다시금 대학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당시엔 술 마시고 싶을 때면 밤늦게 서로를 불러내곤 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슬리퍼를 질질 끌며 학교 앞 막걸리 집에서 만나곤 했다. 그런데 이제 둘 다 직장인이 되었다니, 시간이 이토록 빨리 흐를 줄이야. 아니나 다를까, 술자리 주제는 이런 그리움이나 회상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유난히도 노는 걸 좋아하고 여자에 관심이 많은 C는 온갖 재밌는 얘기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C는 대부분 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곤 했다. 주위 사람들을 많이 챙기는 타입이었다. 남자든 여자든 인기가 많았다. 돈을 잘 써서 더욱. C는 여자를 무척 좋아했다. 일생일대의 관심사처럼 보였다. 어쩌면 놀기 좋아하는 20대 후반의 남자라면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C는 돈을 많이 벌며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충분히 즐기며, 잘 살고 있었다. 물론 C는 너무 과하긴 했다. 이 녀석, 얼마 전에 여자친구랑 헤어졌다더니 증상이 더 심해진 거 같다.
C의 이야기를 들으며 때론 맞장구를 쳐주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하고, 미친놈이라며 웃기도 하고, 쓰레기라며 욕을 하기도 했다. 여자 이야기라고 해서 마냥 나쁜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냥 살아가는 이야기에 가까웠다. 우리 인생은 사랑 아니면 여행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그 사람 말대로라면 우리는 인생의 절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퇴근 후에도 카페에 가서 책 읽고 글 쓰는 나에게 어느 정도 필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 결혼, 마틴 하이데거와 한나 아렌트의 정신적 사랑을 떠올리며 환상에 사로잡혀있는 나에겐 현실적인 감각이 필요했다. 나와 정 반대편에 있는 C의 존재는 현재 내가 서있는 곳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물론 둘 다 상태가 영 안 좋긴 했다. 뭐든 중간이 최고인 법인데.
그렇게 C와 술을 먹다 보니 어느새 머리가 무척 가벼워졌다. 머릿속에서 니체와 칸트가 사라졌다. 사회 문제나 정치, 부산 문화 판에 대한 고민도 사라졌다. 그냥 친구와 아무 의미 없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는 박정오만 남아 있었다. 욕도 자주 내뱉었다. 혹시 누군가 우리들의 얘기를 엿듣는다면 참으로 한심하게 볼 것이다. 남자 두 명이 칙칙하게 앉아 칙칙한 안주를 먹으며 여자 이야기만 주구장창 하고 있었으니. 아무렴 어떤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도 고상하고, 내가 자주 만나는 사람들도 모두 고상하다. 나도 이런 특별한 기회가 아니면 항상 고상할 수밖에 없다. 그런 직업이고, 그런 일이다. 그래야만 한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을 좀 더 즐겁게 보내야지. 항상 고상할 필요는 없잖아?
*
어느새 술을 제법 먹은 C가 나에게 다그치듯 말한다. 맨날 책만 읽지 말고 좀 놀아 보라고. 그러다 20대 다 끝나면 어떡할 거냐고. 나는 대답한다. 나도 너처럼 쾌락적인 인간이면 좋겠다만, 천성이 그러지 못 해 의도적으로 쾌락을 즐기려 노력하는 게 더 힘들 것 같다고 했다. 다시금 C가 말한다. 책 읽고 글 쓰는 것만 노력하지 말고 자기처럼 클럽도 자주 다니고 소개팅도 자주 하면서 이성을 만나기 위해 노력 좀 해보라고. 뭐, 인정. 너는 엄청난 노력파 맞지. 거기에 비하면 성과가 좀 아쉬운 거 같긴 한데... 머리가 조금만 더 작았으면, 얼굴이 조금만 더 잘생겼으면 성과도 있었을 텐데. 내가 아쉽다, 야. C의 반박이 이어진다. 마, 도랐나. 내 몸 좋다. 운동 졸라 열심히 하거든. 가슴 만져봐라. 딴딴하다! 돌이다, 돌! C가 가슴에 잔뜩 힘을 주더니 내 앞으로 내민다. 내가 니 가슴을 왜 만지냐... 더럽다, 치아라. 놀라울 만큼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잔을 기울였다. 술이 얼큰하게 올라온다. 야, 너가 정말 후회 없이 실컷 놀고 나면, 나중에 너 인터뷰해서 글이나 써 볼게. 주제는 남자의 욕망? 내가 고상함 속에 너무 빠져 있을 때 한 번씩 너 만나면서 환기도 하고, 글도 쓰고, 책도 내고, 그걸로 돈 벌면 또 이렇게 술 마시고, 얼마나 좋냐. 그러니 너는 앞으로도 재밌게 놀거렴. 나는 옆에서 열심히 관찰할게, 온갖 이상한 말을 지껄였다. 아, 술을 너무 많이 먹었구나. 어쨌든 짠!
*<저도 편집자는 처음이라> 마지막 챕터는 '사회 초년생'에 초점을 맞춰 연재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