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나는 이런 놈인가 보다. 내일 카페에 가서 책이나 읽어야지.
아, 책가방 진짜... C의 핀잔에 곧장 항변했다. 닥치라, 안 간다고 했는데 니가 억지로 데리고 왔잖아. 야, 아무리 그래도 썰파에 책가방 메고 가는 건 좀 오버다. 등으로 메지 말고 차라리 한 손에 들어라. 아, 진짜 귀찮게 하네... 택시에서 내리니 광안대교가 장엄하게 펼쳐져 있었다. 금요일 저녁, 광안리 해변가는 수많은 사람이 북적이고 있었다. 몇 발자국 걸으니 이내 목적지가 나왔다. 이름하여 썰스데이파티! 대학 시절 친구들과 간단하게 맥주 한잔하러 온 적이 몇 번 있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체인점이었는데, 같은 가게라도 지점에 따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내가 이전에 갔었던 곳은 대학가 앞에 있어서 친구 혹은 동아리 사람끼리 가볍게 오는 경우나 교환학생 혹은 유학을 온 외국인 학생들이 많이 오곤 했다. 반면 C와 함께 도착한 이곳 광안리 지점은, 그야말로 ‘핫플레이스’였다. 키 크고 잘생긴 남자들이 옷을 쫙 빼입고 있었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짙은 화장에 몸매를 부각하는 옷으로 자신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고 있었다. 입장하려 하니 손목에 도장을 쿵 하고 찍어줬다. 썰스데이파티! 가게 안은 파티장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다들 쿵쾅거리는 음악에 몸을 맡긴 채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워낙 사람이 많아 한 걸음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다.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간신히 자리에 앉았다. 맥주를 시켰다. 와, 여기 사람 엄청 많다... 클럽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이곳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만 같았다.
C는 노는 걸 유난히도 좋아하는 대학 친구였다. 이성과의 만남이 일생일대의 관심사처럼 보였다. 항상 여자친구가 있었고, 잠깐 헤어져 솔로인 상태에서도 끊임없이 소개를 받거나 클럽을 다니곤 했다. 오늘 저녁, C는 갑자기 둘이서 한잔하자며 부산에 내려왔다. 치킨집에서 가볍게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C는 내게 제발 독서, 글쓰기 좀 그만하라고 말했다. 20대가 다 끝나가는데 어떻게 클럽 한 번 안 가봤냐면서 혀를 끌끌 차더니, 제발 자기처럼 쾌락에 몸을 맡긴 채 인생을 즐겨보라고 다그쳤다. 글쓰기만 노력하지 말고, 여자 만나기 위한 노력 좀 해보라고 했다. 아니, 당장 여자친구 안 만들어도 되니까 제발 좀 놀아보라고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광안리 ‘썰스데이파티’에 가자고 했다. 나는 가기 싫다고 몇 번이나 거절했지만, 얼마 전 솔로가 된 C는 나를 집요하게 설득했다. 클럽이야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과 자주 갈 테니, 유흥에 별 관심이 없는 나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크지 않았을까. 계속 거절을 하니 나중에는 애걸복걸하는 수준이 되었다. 너 데리고 클럽 가는 게 소원인데, 거긴 죽어도 안 갈 거 같으니 ‘썰파’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다. 결국 C의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고, 퇴근 후 복장과 상태 그대로 광안리 썰파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
퇴근 후 별다른 약속이 없으면 집 근처 카페에서 책 읽고 글을 쓰던 나에게, 이곳은 새로운 세계였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 어두운 조명, 한껏 매력을 뿜고 있는 젊은 남녀들, 다양한 종류의 술은 그 분위기로만 취할 것만 같았다. 여기저기서 강한 향수 냄새가 났다. 여자끼리 모여 있는 테이블은 남자들이 계속해서 서성였다. 그들은 모르는 여성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대부분은 실패했지만, 간혹 합석에 성공하는 경우도 있었다. 저게 바로 헌팅이라는 걸까.
C는 맥주를 몇 모금 훌쩍이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여성이 앉아있는 테이블이면 무조건 가서 말을 걸었다. 거리도 있고 워낙 시끄러워서 무슨 얘기를 어떻게 나누는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단 한 가지 확인할 수 있는 게 있다면, C가 말을 건 여성들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다는 것. 그리고 C가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는 것. 먼발치서 C가 헌팅에 실패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처음 한두 번은 그러려니 하다가도, 계속해서 실패하자 지금의 상황이 문득 우습게 다가왔다. C는 나름 키도 크고 옷도 잘 입는 편이었다. 클럽을 그렇게 많이 다닌다고 하니, 처음 보는 이성에게 말을 거는 것도 능숙할 거라 확신했다. 역시, 얼굴이 영 아닌가, 매력이 없는 걸까. 결국 C는 가게를 한 바퀴 다 돌았음에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힘없이 자리에 앉더니, 이내 나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노력하는데, 너는 대체 뭐하냐고. 저기 옆 테이블에 말 한마디라고 걸어보라며 나의 등을 떠밀었다. 나는 이내 난색을 표했다. 그런 건 절대 못한다고. 차라리 책 한 권을 쓰는 게 더 쉬울 거 같다고 했다. 아니면 인터뷰를 백 명 하든가. 아니, 일주일을 연달아 야근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만 같다. 아무튼 이런 곳에서 처음 보는 여자에게 다가가서 합석을 제안하는 건, 아니 말 거는 건 죽어도 못하겠다고 했다. C는 한심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한 바퀴 돌았다. 그 뒷모습이 애처롭게까지 느껴졌다. C가 합석에 성공해 실제로 몇몇 여성과 함께 온다면 그거대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겠지만, 다행히도 C는 모조리 실패했다. C가 조금만 더 잘 생겼으면 어땠을까, 홀로 웃음을 터뜨렸다.
책과 글의 세계에 지나치게 빠져 있었던 탓일까. 20대가 이런 유흥을 한 번씩 즐기는 건 자연스러운 모습에 가까웠다. 나쁜 짓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처음 보는 이성과 만나 이야기 나누고, 혹시라도 서로 마음에 들면 관계를 발전시켜나가면 되는 일이었다. 소개를 받든, 각종 모임에서 누군가와 만나든,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지인과 연인관계로 발전하든, 이렇게 클럽 같은 곳에서 만나든, 무엇이 더 낫고 나쁘고는 없었다. 독서모임에서 만났다고 건전한 거고, 클럽에서 만났다고 건전하지 않다고 보는 건 편견이었다. 물론 내가 말 한마디 못 건네는 이유가 편견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나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그저 숙맥일 뿐.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각, 어느새 가게에 들어온 지 두 시간이 지나있었다. 가게 내부를 무려 두 바퀴나 돌았지만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 C는 유난히도 지쳐 보였다. 야, 집에 가자. 이 얼마나 기다렸던 말인가, C의 말에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 공기가 유난히도 시원하게 느껴졌다. 옆 건물을 보니 24시간 카페가 떡하니 있었다. 이따금 저런 카페에서 밤늦게까지 글을 쓰고 새벽 공기를 마시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지금의 모습이 유난히도 낯설게 다가왔다.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 한 손으로 들고 있던 책가방을 다시금 어깨에 멨다. C는 그런 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든지 말든지, 아무래도 이 모습이 편했다. 직장인이 되었지만 대학생이나 메고 다닐 법한 가방을 메고, 허구한 날 카페에서 책 읽고 글 쓰는 모습이.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선의, 새로운 것에 대한 호의를 가져라’
니체가 그랬던가. 나에겐 책과 글이 익숙한 것이고, 이런 유흥이 낯설고 새로운 것이었다. 오늘 나는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선의, 새로운 것에 대한 호의를 가지기 위해 열심히 발버둥 쳤지만, 아무래도 꽝이다. 나답지 않은 옷을 억지로 두르고 있으려니 불편해 죽을 뻔했다. 니체도 썰파에 갔다면, 나처럼 이성에게 말 한마디 못 걸고 홀로 맥주를 훌쩍이고 있었겠지! 이렇게 20대가 저무는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도 없는 행동으로 남은 20대를 채우면 오히려 더 후회할 것만 같다. 역시나 나는 이런 놈인가 보다. 내일 카페에 가서 책이나 읽어야지.
*
새벽 한 시 반. 택시에서 내려 집 근처 해장국집으로 향했다. 이모, 여기 해장국 두 그릇이요. 소주 한 병을 시킬까 하다가 부질없는 짓인 거 같아 관뒀다. 잠시 후 해장국이 나왔다. 살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뼈다귀를 꺼내 발라먹기 시작했다. 정오!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싶어 고개를 돌리니, 약 4년 전 함께 대외활동을 했던 동갑내기 친구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활동이 끝난 후론 좀처럼 만날 일이 없었지만, SNS로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와, 오랜만이다. 잘 지냈나. 이 시간에 밥 먹나. 뼈다귀에 붙어 있는 살을 열심히 발라 먹다 말고, 물수건으로 입가를 살짝 닦은 후 대답했다. 방금 광안리에서 버스킹하고 왔지. 친구의 대답에 순간 멍해졌다. 우리도 조금 전까지 광안리에 있었는데...
친구는 사회가 ‘29살 여자’에게 바라는 모습과 사뭇 다른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로 하루하루를 알차게 채워 나가고 있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20대의 끝자락을 맞이하고 있는, 요즘 보기 드문 친구였다. 그런데 어째, 이렇게 만나니 기분이 묘했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친구는 자신의 꿈과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고, 나는 C를 따라 광안리 술집, 그것도 클럽 비스무리한 곳에서 여성들에게 계속 까이기만 하다가 결국 해장국집에서 하루의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나도 또래에 비해선 나름 열정적으로 사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의 모습이 유난히도 초라하게 다가왔다. 정말 오랜만에 만난 건데, 하필 이렇게 마주치다니. 문득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야, 쟤 누군데? 예쁜데? 소개 시켜도. 해장국집을 나오자마자 C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C의 모습을 보니 내가 괜히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쟤 남자친구 있다. C가 집요하게 매달릴 게 눈에 보듯 뻔했기에, 딱 잘라 말했다. 내가 알기론 친구는 솔로였다. 다만 저렇게 꿈과 열정으로 가득한 순수한 애를 차마 C에게 소개시켜 줄 순 없었다. 야, 아이스크림 먹자. C가 편의점 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런 C의 뒷모습을 보면서 절로 한숨이 나왔고, 이어서 웃음이 터졌다. 오늘의 일탈이 저물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