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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오 Aug 24. 2019

먹고사는 게 뭐 쉽습니까?

우선 성과를 내야 한다. 의미와 가치는 그다음이다.

   - 이제 먹어도 돼요?


   점원에게 물으니 다 익혀서 나오는 거라는 대답을 들었다. 야, 누가 팔팔 끓을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냐. 아, 그럼 먹으면 되겠네! 먼저 드세요,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테이블 위에는 해물찜 하나가 푸짐하게 있었다. A 형이 앞접시를 가져와 한 명씩 떠주려 하자 B 형이 그냥 각자 먹자며 행동을 저지했다. A 형과 B 형을 제외하면 대부분 어린 여자 동생들이었다. 막내와 고참이 약 10살 차이가 나는 신기한 조합. 그래서 좀 더 특별하고 재미난 이야기가 오가기도 했다. 우리 앞에 놓인 해물찜도 그렇지 않은가. 적당히만 잘 섞이면 깊은 맛이 우러나는 법이다. 그리고 여기에 딱 소주 한잔 걸치면 천국이 따로 없다.


   - 분명 좋은 취지로 열심히 한 건 맞죠. 근데 그거랑 수익 모델 만들어서 지속 가능하게 하는 거랑은 다르지 않습니까.

   - 돈 될 만한 거도 생각해봐야죠, 예?


   나와 B 형은 번갈아 가며 A 형을 몰아붙였다. 문제인즉슨, A 형은 의미 있는 활동을 그 어떤 대가 없이 오랫동안 해오고 있었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관심은 줄어들고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며 활동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 어떤 욕심 없이 불특정 다수를 위해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일을 한다고 해서 누군가 알아주거나 현실적 어려움이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 일단 짠 하자, 짠.

   - 에이, 행님은 입만 대면서 왜 자꾸 짠 하자 합니까

   - 행님부터 파도타기 합시다, 원샷!


   해물찜 사이 어묵 꼬치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다섯 명인데 꼬치는 네 개였다. 내가 하나를 다 먹으려니 눈치가 보였다. 집게와 가위로 어묵을 잘라 국물 안에 넣었다. 그중 가장 큼지막한 놈을 하나 건졌다. 막 입에 넣으려 하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는 동생 C가 갑자기 소주잔을 들었다. 짠. 안주를 먹으려다 말고 나 역시 소주잔을 들었다. A 형과 10살 가까이 차이 나는, 아직 20대 초반인 막내였는데, 역시 술을 잘 마신다. 젊구나, 젊어. 이내 앞접시에 덜어놓은 어묵을 입에 넣었다. 국물이 많이 쫄아서 그런지 무척 짠 맛이었다. 물을 좀 넣어야 할까. 여기 육수 추가 돼요? 점원이 이내 육수가 담긴 주전자를 가져왔다.


   행님도 아시잖아요? 제가 막 대외활동 시작할 때부터 지금 이렇게 회사 생활 하는 모습까지 다 지켜봤지 않습니까. 근데요, 저도 의미나 가치를 막 따졌잖아요. 그땐 워낙 열정이 불타올라서 그렇긴 한데. 국물 맛 좀 괜찮습니까? 물 좀 더 넣을까요? 그렇게 순수하게 무언가를 한다는 게 어렵긴 한데, 어떻게 보면 자기 마음 편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차피 돈 벌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적당히만 하면 다들 박수 쳐주고 멋있다 해주니까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하니까 지속이 안 되더라고요.


   - 막차 얼마 안 남았는데 우짤까. 일어날까, 아니면 더 마실래.

   - 내일 출근이라 많이는 못 마실 거 같은데.

   - 나도 출근이다, 출근. 그래도 좀 아쉽지 않나.


   그럼 더 마시죠. 여기 대선 한 병이요. 아무튼 저희 회사도 그렇습니다. 책 만드는 일이라 의미 있고 가치도 있는 거 같지만, 사실 책 만드는 일만으로는 돈이 안 돼요. 그래서 대표님이 매일 여기저기 영업하고 다니면서 돈 벌어 와서 회사가 겨우 유지돼요. 저도 상반기가 그나마 낫지, 하반기가 되면 돈 버는 일 한다고 정신없어요. 일 10개를 하면 제가 하고 싶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은 한두 개밖에 안 되더라고요. 점원이 소주를 가져왔다. 네, 감사합니다. 행님 제가 한 잔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발버둥 쳐도 살아남을까 말까 하는데, 내가 의미 있는 일 꾸준히 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고 성과도 나오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건 진짜 욕심 아닙니까. 행님이 하던 걸로 어떻게 하면 수익 구조 만들 수 있을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열심히 발품도 팔고 영업도 뛸 각오로 하시든가, 아니면 지금처럼 하든 그만두든 냉정하게 생각해봐야죠.


   - 정오 이제 직장인 다 됐네.

   - 먹고사는 게 뭐 쉽습니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 하면 사람들이 알아서 알아주고, 그래서 돈벌이가 알아서 생기고, 그걸로 먹고 살면서 의미 있는 일 계속하고. 그런 게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자기가 졸라 열심히 해서 그런 조건들 만들어나가야지.


   술기운이 올라와서 그런지 말이 조금 세졌다. 의미나 가치, 내가 그런 거 믿다가 엄청 힘들어 봤으니까.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은 없다. 잘된 일에 대해 사람들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온갖 의미와 가치가 자신의 행위를 좋게 포장해줄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어쨌든 주어진 일을 잘해내야 한다. 그래서 돈을 벌든 유명해지든 성과를 내야 한다. 그래야 의미나 가치가 생긴다. 지난날의 나는 의미와 가치를 쫓았지만 일을 잘해내지 못했다. 그래서 실패했고 비참한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이러한 과거의 경험이 나를 사무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술자리에서 나보다 나이 많은 형에게 이런 소리나 하고 있는 거겠지. 다만 지난 아픈 기억을 뛰어넘을 만한 자극이 아니면 이러한 성향이 좀처럼 바뀌지 않을 거 같다. 일이 먼저다. 일을 잘해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 우선 성과를 내야 한다. 인정받아야 한다. 의미와 가치는 그다음이다. 술잔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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