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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오 Nov 12. 2019

따분하고 지루한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낸다는 것

비록 찰나의 순간이긴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소중했다

   퇴근길. 장엄하게 펼쳐진 광안대교에 자줏빛 구름이 걸려있다. 그 구름을 따라 형형색색의 차들이 지나간다. 화려한 풍경은 매일 지나치는 퇴근길임에도 나의 발목을 잡는다. 자전거 페달을 밟다 말고 멍하니 서서 바라본다. 마치 천국에 온 것만 같은 기분. 문득 저 멀리서 내 모습이 자그맣게 보일까 궁금해진다. 자줏빛 하늘 아래 바닷가에서 자전거를 타는 광경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테다. 오늘 하루로 여기저기서 탈탈 털리고 남은 힘으로 간신히 퇴근한다는 사실을 알까 싶다. 홀로 투덜거리다 문득 내가 바라본 풍경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구름 위를 지나가는 차 안에는, 힘든 밥벌이를 마치고 축 널브러진 직장인이 타고 있지 않을까. 결국 속사정을 모르면서 서로를 부러워하는 셈이다. 뭐든 멀리서 볼 때 아름다운 법이다.


   뭐든 좋으니 책 관련 일을 하고 싶다던 공대생은 우연한 기회로 출판사 편집자가 되었다. 안 팔려도 좋으니 내 이름으로 책 한 권을 쓰고 싶다던 작가 지망생은 우연한 기회로 작가가 되었다. 막연하게 품었던 이상은 현실이 되었지만,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 내가 만들고 싶은 책보다 그렇지 않은 책을 만드는 일이 더 많다. 회사 업무 중 하기 싫은 일이 더 많다. 책 만드는 일보다 한참은 거리가 먼 잡다하고 귀찮은 일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허울만 작가일 뿐, 작가와는 거리가 먼 삶이다. 작심하고 제대로 된 글을 쓴 게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최근 읽고 쓰는 시간이 부쩍 줄었다. 아무래도 멀리서 바라볼 때가 가장 행복했던 거 같다. 이상의 무게감은, 결코 만만치 않은가 보다.



   *


   하늘은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장엄한 광안대교와 그 위에 걸린 자줏빛 구름이 만들어낸 화려함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석양이 아름다운 이유는, 찰나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 잠깐의 순간이 가슴 설레는 절경을 만드는 셈이다. 다시금 어두컴컴하고 밋밋한 풍경이 펼쳐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석양이 아름답지 않은 것도, 광안대교가 화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편집자로서의 삶이든, 작가로서의 삶이든, 따분하고 지겨운 일상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구름 위를 걷는 순간이 분명 존재했다. 내가 처음으로 책임편집을 맡은 책이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팬으로 구독하던 작가님께 연락해 출간 허락을 받았을 때, 책 출간 후 새로운 일상과 마주하는 작가님의 기대와 설렘 가득한 표정을 보았을 때, 책을 계기로 삶의 다음 발걸음을 걸어 나가는 작가님들을 모습을 지켜볼 때. 그 순간들은 충분히 화려했고 또 아름다웠다. 비록 찰나의 순간이긴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소중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다시금 페달을 밟았다. 화려한 풍경은 금세 사라졌고, 다시금 따분하고 고단한 퇴근길이 펼쳐졌다. 다만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찰나의 순간이 머릿속에 있었다.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 순간이 언제 다시 올지 모르지만, 그때를 더 소중하게 만드는 건 현재의 묵묵한 움직임이었다. 지루하고 재미없을지도 모를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내는 일이었다. 퇴근하는 차들로 가득한 거리, 그 옆에 있는 자전거 도로를 열심히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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