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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오 Nov 14. 2019

어느 편집자의, 성장통

주어진 일이라도 제대로 해내고 싶은데, 그마저도 잘 안 되고 있다

   허둥지둥 수영장에 발을 디딘다. 단체로 줄 지어 몸을 풀고 있다. 뒤늦게 대열에 합류한다. 이내 수업이 시작된다. 자유형 네 바퀴, 배영 두 바퀴, 평형 두 바퀴, 접영 물타기 네 바퀴. 진도를 나가기보다 이제까지 배운 걸 복습하기 바쁘다. 50분 수업에 벌써 40분이 지나갔다. 그제야 강사님이 다가와 접영 발차기를 가르쳐준다. 서툴게 몸을 움직인다. 역시나 어렵다. 10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배움의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하지만 이 10분을 위해 그 네 배나 되는 시간을 온전히 연습에만 집중했다. 40분간 팔다리를 열심히 저었기에, 10분의 배움이 더욱 빛이 날 수 있었다. 내일도 40분의 연습과 10분의 배움이 반복되지 않을까.


   *


   회사에 출근하니 디자이너 선배님의 표정이 안 좋다. 무슨 일인고 물으니 인쇄사고가 났다고 한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출판사에선 한 번에 보통 1,000부씩 인쇄를 한다. 한 번의 실수가 천 개의 상품에 반영되는 셈이다. 액수로 치면 200~300만 원, 이러니 자그마한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제작 중인 전집 박스 인쇄가 잘못되었다고 한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종이도 얼마 안 들었고, 인쇄비용도 적었다. 그럼에도 인쇄사고가 났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돈 10만 원이 증발했다. 그와 함께 예정된 여러 가지 일정이 꼬였다.


   하반기를 시작하는 시점, 사무실 분위기가 유난히도 무거웠다. 여느 월요일처럼 주간 회의를 진행했다. 상반기에 대한 간략한 평가 후 피드백이 이어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분명 숨 가쁘게 뛰어가고는 있었지만, 내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확신이 없었다. 편집자로서 새로운 콘텐츠를 발굴하기보단 행사나 프로그램 기획, 커뮤니티, SNS 관리, 마케팅 등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아직 편집 실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자그마한 일에도 허둥대는 게 다반사였다. 나는 문화기획자인가, 청년활동가인가, 작가인가, 편집자인가. 내 정체성에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책 만드는 일이 나와 맞지 않는 건 아닐까. 최소한 흥미는 있는 걸까. 그냥 책을 매개로 무언가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상반기에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맞이한 하반기는 영 불편하고 또 불안했다.


   할 일이 한참 쌓여있음에도 예상치 못한 잡무들이 등장해 시간을 갉아먹었다. 소셜펀딩을 준비 중이었는데, 사이트에서 승인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몇 번이나 수정하고, 또 수정했다. 최근에 신간 네 권이 시리즈로 나왔다. 책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 각종 기관 및 단체, 개인에게 책을 보내야 했다. 어떤 작가님은 무리한 권수를 요구했다. 어떤 작가님은 몇몇 기관은 출판사에서 직접 보내 달라했고, 또 몇몇 기관은 자기 집으로 보내주면 자신이 직접 전달하겠다고 했다. 정보 취합도 잘 안 되었고 작가님마다 출판사에 원하는 게 각자 달랐다. 책에 쓰인 사진 중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게 몇 장 있었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다. 원래 한 장 당 만 원이라 했는데, 갑자기 삼만 원을 달라고 했다. 얘기가 어떻게 된 거냐며, 다시 작가님께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전화와 문자가 오갔다. 다행히 별 탈 없이 해결되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시계를 본다. 벌써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검토해야 할 원고도 몇 개 있는데, 준비 중인 교육 과정 지원 신청서 검토도 해야 하는데, 진행 중인 공모사업 보고서도 써야 하는데, 여기저기 메일도 보내야 하는데. 아무것도 못 하고 하루가 끝나버렸다. 편집자로서 하는 일은 얼마 없어 보인다. 그냥 주어진 일을 급하게 쳐내고, 문제가 생기면 여기저기 전화해 해결하기 급급한, 평범한 사무직이다. 이러니 편집 역량이 길러질 리 있겠는가. 편집자로서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까 싶다.


   *


   대표님, 잠시 시간 있으십니까. 업무를 보던 대표님이 고개를 들었다. 제가 요즘 고민이 있는데... 결국 고민을 홀로 삭이지 못하고 대표님께 털어놓는다. 저, 편집자로서 정체성을 못 찾겠습니다. 상반기가 끝났는데, 돌아보니까 별다른 성과도 없더라고요. 그래도 작년에는 처음으로 책임편집을 맡아서 책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서울에 있는 저자한테 연락해서 곧장 두 번째 책임편집 책을 기획하기도 하고, 소셜펀딩에 처음 도전해서 성과도 제법 냈던 거 같은데요. 올해는 뭐랄까, 그냥 시키는 것만 쳐내기 급급하면서 시간만 축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편집자 이야기로 단행본을 낸다는 거나, 이번에 진행하는 편집자 양성 과정 실무를 맡는다든가, 책 기획이랑은 거리가 먼 일에만 빠져 있는 거 같고요. 진짜 편집자를 하고 싶은 게 맞는지, 문화기획자나 작가 쪽에 한눈팔고 있는 건 아닌지, 자꾸 의문이 듭니다.


   그나마 편집자로서 기획한 책이 두 권인데, 전부 에세이네요. 최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콘텐츠도 대부분 에세이고요. 요즘 에세이가 잘나가니까, 베스트셀러 중 에세이가 압도적으로 많으니까, 그리고 기획하기도 편하고 쉬우니까 계속 이것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전 사실 에세이를 그리 즐겨 읽는 편도 아닌데 말이죠. 막상 제가 관심 많은 인문 사회 분야 책을 기획하려 해도, 너무 막막합니다. 저자는 어떻게 찾아야 할지, 어떻게 컨택해야 할지, 외서는 또 어디서 찾아야 할지 감이 안 잡히네요. 당장 쉽고 편한 것만 하려다 지금 이 수준에서 머무르는 게 아닐까 불안한데, 다음 스텝을 어떤 식으로 어떻게 밟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속앓이하고 있던 걸 모조리 털어놓으니 속이 시원했다.


   대화가 끝나니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바쁜 것만 좀 정리되면 소주 한잔 하자. 대표님의 마무리 멘트에, 오늘 한 잔 어떠십니까,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최근 회사 술자리는 종종 있었지만, 대표님과 단둘이서 술을 마신 지는 제법 된 거 같다. 사실 이 얘기도 술자리에서 하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퇴근을 앞두고 아무렇게나 나와 버렸다. 유익한 답변을 듣긴 했지만, 나의 의문과 답답함은 속 시원하게 해결되진 않았다. 남은 건 스스로 해결하도록 남겨둬야 하는 걸까. 먼저 가보겠습니다. 대표님께 인사를 드리고 먼저 사무실을 나왔다.


   *


   집으로 가는 길. 머릿속이 여전히 무거웠다. 작년만 해도 내가 하고 싶은 일로 밥벌이를 하게 되었다며 내내 들떠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출판 분야에 발을 디디자 한없이 치열하고 고독한 세계가 펼쳐졌다. 그냥 시키는 것만 해도 충분히 힘든 직장생활인데, 스스로 생각하며 창의성을 발휘해야 하는 일까지 너무도 많다. 알아야 하는 것도, 신경 써야 하는 것도, 무진장 많다. 이렇게 힘들 줄 알았다면, 과연 이 세계에 발을 디뎠을까 싶다. 입사한 지 2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다. 업무 파악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다. 창의성을 번뜩 발휘하며 이 시대가 원하는 책을 슥슥 기획하는 것까진 바라지 않는다. 주어진 일이라도 제대로 해내고 싶은데, 그마저도 잘 안 되고 있다. 그동안 회사에서 대체 뭘 배운 걸까 싶다. 이 일에 영 소질이 없는 것만 같다. 물론 이렇게 넋두리를 늘어놓아도 진로 고민 따윈 다시 하지 않을 거라는 거, 그럼에도 이 험난한 길을 묵묵히 걸어갈 거라는 거, 스스로가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참 싫다, 꿈이라는 놈이. 쥐뿔도 없으면서 늘 이렇게 똥폼만 잡고 있다.


   작년을 돌아보니 지금과 비슷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가 몇 번 있었다. 내가 야심차게 준비한 공모사업에서 모조리 떨어졌을 때, 커뮤니티를 만들어보겠다며 큰소리치다가 얼마 안 가 지쳤을 때, 정신없는 연말을 보낼 때였다. 회사 생활에 대해, 내 역량에 대해, 내 적성에 대해, 내가 걸어갈 길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가졌다.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가장 힘들었지만, 그만큼 성장했던 시기였다. 답답함과 불안함이 없다는 건,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는 증거라 확신한다. 그냥 편안하게 회사를 다니고 있다는 건, 주어진 일만 적당히 하면서 기계적으로 회사를 다니고 있다는 증거라 믿는다. 어쩌면 지금도,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도약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


   내일 아침에도 어김없이 수영장에 출근 도장을 찍을 생각이다. 수영장에 내 온몸을 풍덩 맡기며 그동안 배운 걸 실제로 연습하는 시간, 팔다리를 분주하게 움직이는 시간이 다시금 펼쳐지지 않을까 싶다. 50분 수업에 무려 40분을 연습에 또 투자할 테다. 이후엔 어김없이 배움의 시간이 펼쳐질 것이다. 원래 배움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은 법. 낯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지만, 그 10분이 쌓이고 쌓여 변화를 만들어낸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음-파' 하느라 바빴던 내가, 어설프게나마 자유형과 배영, 평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부지런히 출근 도장을 찍은 덕분에 이제 접영을 배우기 시작한 것처럼 말이다.


   편집자로서의 여정 역시, 그 10분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40분간 열심히 달렸으니, 10분간 내가 지나온 흔적들을 돌이켜보며 재검검하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고통스러운 배움의 시간이 펼쳐지겠지만, 이 시간들이 모이고 또 모이며 나를 더 나은 편집자로 이끌어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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