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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오 Nov 14. 2019

일이란, 무엇인가.

독자들은 만드는 과정까지 고려해서 상품을 평가하지 않는다

   편집자로 일하다 보면 여러 유형의 일을 만나게 된다. 


   첫 번째. 일이 쉽고 편한데 담당자(주로 작가)도 좋은 경우. 처음 계획한 대로 일이 척척 진행된다. 별다른 스트레스가 없다. 일이 즐겁다. 업무 강도 '하'. 


   두 번째. 일은 쉬운데 담당자가 별로인 경우. 사소한 일로 자꾸 트집을 잡는다. 요구 사항이 많다. 쉽게 돈 벌 생각하지 말라는 듯, 나를 일부러 괴롭히는 기분이다. 업무 강도 '중'


   세 번째. 일은 어려운데 담당자가 좋은 경우. 우선 일을 시작할 때부터 촉박한 일정이 주어진다.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만 같은 일을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 담당자로부터 '죄송합니다'라는 말은 밥 먹듯 듣지만, 그렇다고 바쁨이 해소되진 않는다. 업무 강도 '중상'


   네 번째. 일이 어려운데 담당자도 별로인 경우. 최악이다. 일정이 꼬일 대로 꼬이는데, 담당자는 계속 무리한 요구사항을 늘어놓는다. 그러다 일이 조금이라도 틀어질 기미가 보이면, 준비했다는 듯 책임을 떠넘긴다. 업무 강도 '상'


   여기까지는 회사 안에서 일하는 직원들 시점에서 바라본 일이다. 하지만 ‘일’이라는 건, ‘성과’를 빼놓고는 결코 이야기할 수 없다. 또한 성과는 예측하기가 무척 어렵다. 우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책을 만들었든, 독자들은 그것까지 고려해서 우리 책을 평가해주지 않는다. 일도 쉽고 담당자도 좋은데 성과가 나쁜 경우가 있고, 일도 어렵고 담당자도 최악인데 성과가 좋은 경우가 있다. 출판업에서 성과는 대개 '시장 반응'이다. 이러한 사례들이 편집자를 계속 헷갈리게 한다. 


   *


   사례 하나. 어느 작가님과 작업하는데 소통이 잘 안 되었다. 빠듯한 일정에 요구 사항이 많았다. 자연스레 업무 강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담당 디자이너는 계속 야근을 해야만 했다. 험난한 과정을 거치며 간신히 책이 나왔다. 책 내용은 좋았지만, 작업 과정이 결코 우아하지 않았기에 출간 후에도 설렘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하나의 '일'을 쳐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출간 직후, 책은 여러 경로를 통해 많이 판매되었다. 큼지막한 주문이 연이어 들어왔다. 덕분에 위태위태하던 회사 통장 잔고를 두둑이 채울 수 있었다. 돈 걱정을 덜 하면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좋은 내용의 책이었고, 많이 팔렸다. 의미도 챙기고 돈도 챙길 수 있는,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결과물이었다. 불만, 짜증, 분노 등 부정적인 감정으로 가득했던 작업 과정은 놀라울 만큼 빠르게 잊혔다. 다만 그 책을 편집하고 디자인했던 출판사 직원들에게는 그저 '좋은 책'으로, '잘 팔렸던 책'으로 기억될 뿐이었다.


   *


   사례 둘. 우선 품이 많이 드는 책이었다. 원고가 많았고, 사진은 더 많았다. 그것도 그냥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전화해서 사용 허가를 받아야 하는 사진 위주였다. 거기다 원고 감수도 받아야 했다. 보통은 저자랑 둘이서 소통해서 결정하곤 했는데, 몇몇 기관과 협업하다 보니 소통 라인이 무척 복잡했다. 거기다 일정도 빠듯했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 애를 많이 먹었지만, 목표로 했던 일정에 간신히 책이 나왔다. 


   책은 대개 ‘재미’와 ‘의미’ 둘 중 하나만 잡으면 된다고 한다. 이번 책은 우리 출판사에서 나온 그 어떤 책보다 의미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그리 만들고 싶은 책은 아니었지만, 시의성에 기대어 시장 반응이 조금은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출간 후 몇 개월이 지나도록 별다른 시장 반응이 없었다. 매일 아침 직접 출고를 하는 입장에서, 책은 놀라울 만큼 팔리지 않았다. 고생은 고생대로 했는데 아무런 성과가 없는 셈이다. 열심히 만든 책인데, 저자와 출판사 직원 외엔 이 책이 나왔는지도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절로 힘이 빠졌다.


   *


   사례 셋. 원고량도 적당했고 사진도 들어가지 않았다. 표지 작업도 한 번에 OK 사인을 받았다. 저자와 소통도 원활했다. 저자는 과분할 정도로 겸손했고, 출판사에 대한 신뢰가 강했다. 거기다 글 소재와 문체도 최신 트렌드와 가까웠다. 편집자로서 매력적인 원고이기도 했다. 작업 과정이 놀라울 만큼 순탄했다. 그렇지 않아도 다른 일들로 빠듯했던 일정으로 잔뜩 말라가고 있던 우리에게, 단비와 같은 작업이었다.


   책이 출간되었다. 기대했던 것에 비해 시장 반응이 많이 저조했다. 서평 이벤트도 해보고 책을 포스팅하는 각종 SNS에 연락하며 홍보에 힘을 썼지만, 좀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리 고생을 하지 않았던 탓일까. 온갖 어려움과 고초를 겪어서 만들어야, 독자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걸까. 


   좀처럼 대답하기 어려운 의문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닌다. 일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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