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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오 Nov 16. 2019

박 편집자의 정신없었던 하루

편집자란 무엇일까, 편집자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오전


   오늘 오전, 회사 저자 다섯 분과 미팅 약속이 있었다. 참관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다가 갑작스런 사정이 생겨 미팅의 처음부터 끝까지 도맡아 진행해야만 했다. 급하게 준비한 회의 안건을 하나하나씩 헤쳐나갔다. 다행히 미팅은 별문제 없이 잘 흘러갔고, 계약서에 도장을 쿵쿵 찍는 걸 끝으로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미팅이 끝난 후 작가님들을 모시고 회사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일을 무사히 끝내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지금의 자리가 색다르게 다가왔다. 빡빡한 일정 속에서 원고 교정보랴 여기저기 전화해서 사진 구하랴 저자와 디자이너 사이를 조율하랴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책이 잘 나오니 그동안의 모든 힘듦이 깨끗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긴장이 풀린 탓일까, 절로 힘이 빠졌다. 책 만드는 과정은 결코 우아하거나 고상하진 않다. 다만 책이 무사히 잘 나오기만 하면, 이토록 짜릿할 수가 없다!


   #오후


   곧장 사무실에 돌아와, 하반기 출간 예정 독서 목록을 만들었다. 책 제목, 저자, 분야, 책 발행 예정일, 그리고 간단한 소개까지. 인디자인 작업이 마무리 중인 작품부터 이제 막 표지를 구상 중인 작품, 원고 검토 중인 작품, 아직 원고가 나오지 않은 작품까지, 제 각자 분야도 주제도 문체도 작업 진행 상황도 달랐다. 다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올해가 가기 전에 우리 회사 로고가 땅 찍혀 세상 밖으로 나올 거라는 사실! 그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하며 애를 많이 먹일 게 분명했다. 하루에도 몇 번 씩이나 롤러코스터를 타지 않을까 싶다. 책이 나오는 과정도 쉽지 않을뿐더러, 세상에 나온 이후에도 후반작업부터 시작해 마케팅까지 온갖 고뇌를 줄 터이니, 벌써부터 한숨이 나왔다. 그럼에도 영 싫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저 고작 몇 킬로바이트짜리 파일로 존재하는 무형의 것이 책의 형태로 만들어져 내 손에 꼭 쥐어지는, 그 신비한 경험을 선사할 거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설렌다. 편집자란 무엇일까.


   #저녁


   오늘 저녁, 회사 저자님을 모시고 북토크를 진행했다. 하늘이 뻥 뚫린 마냥 비가 쏟아짐에도 몇몇 분이 소중한 발걸음을 해주셨고, 그중엔 작가님의 어머님도 있었다. 자신이 쓴 책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것. 처음으로 북토크의 연사가 되었다는 것. 자신이 쓴 책을 읽은 독자 혹은 자신의 이야기에 관심 가지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이야기한다는 것. 질의응답 시간, 누군가에게 궁금한 존재가 되며, 누군가에게 답변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 불과 한두 시간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주인공이 되는 경험을 하는 것. 그런 뉘앙스의 표정과 눈빛, 말투, 분위기, 드러나지 않지만 느껴지는 무언가. 내가 제안하지 않았다면, 정말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 책이었을까. 모든 것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이 책을 통해 누군가는 작가의 세계에 첫 발을 디뎠고, 누군가는 편집자로서 정체성을 확립했다. 책을 읽은 누군가는 크고 작은 영향을 받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모든 사람이 오늘 한자리에 모였다. 나는 책을 만들라고 월급 받는 존재다. 회사는 책을 판매한 수익으로 돌아간다. 책은 엄연한 상품이다. 그 상품이 많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편집자란 과연 어떤 존재일까.


   북토크를 마치고 작가님, 작가님의 어머님, 회사 대표님, 그리고 나까지 총 네 명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었다. 첫 책이 나오고 북토크를 진행하며 느낀 설렘과 감동은 잠시 접어두어야만 했다. 홍보 마케팅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의미와 가치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던 환상의 세계에서, 다시금 계산기를 두드려야 하는 현실의 세계로 돌아온 셈이다. 어떻게 하면 책을 팔 수 있을까. 이 어렵고 무거운 명제 앞에서 나는 다시금 나약한 존재가 된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책을 기획해서 세상에 선보인다. 그 진심을 알아준 수많은 독자가 책을 구입한다. 책 판매량이 올라간다. 덕분에 저자는 글 쓰는 일에만 매진할 수 있게 된다. 출판사는 돈 걱정 없이 오롯이 만들고 싶은 책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다. 한없이 이상적이고 멋진, 딱 그만큼 현실적이지 않은 순환고리다. 그럼에도 허황된 꿈을 품어본다. 어떻게 하면 책을 팔 수 있을까. 이 고민을 시작으로 환상의 세계를 현실의 문법으로 돌파해보겠다며 각오를 다진다. 책을 많이 판다고 해서 내가 그만큼 돈을 더 받는 건 아니다. 다만 내가 좋다고 판단한 콘텐츠를 보다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욕심은, 자본의 논리에서 잠시 벗어난다.


   식사를 마친 후 작가님의 어머님과 단둘이서 잠깐 얘기를 나눴다. 남들과 다른 길, 어려운 길을 걸어가는 딸이 그동안 많이 걱정되었다고 했다. 그래도 이렇게 첫 책이 나오고 독자들과 만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까 뿌듯하다고 했다. 편집자님이 책을 내자고 먼저 제안해준 걸 딸이 무척 고마워한다고 했다. 자신도 마찬가지로, 정말 고맙다고 했다. 편집자로서 맡은 일을 했을 뿐인데, 회사 일을 했을 뿐인데, 누군가에겐 고마운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 무척 낯설게 다가왔다. 아뇨, 제가 더 감사합니다. 괜히 뭉클했다. 문득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밤


   집으로 가는 길,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이 시간에 뭔 일이고. 회사 행사 마치고 집 가는 길입니다. 바쁘네, 밥은 먹었나. 너희 아부지 또 술 많이 드셨다. 니 동생은 어제 새벽 세 시까지 공부했단다. 평소처럼 이런저런 소식을 나누었다. 어무이, 제가 하는 일이 참 신기한 거 같아요. 요즘에 출판 경기도 안 좋고, 열심히 글 써서 책 내도 돈을 얼마 못 벌거든요. 그래도 뭐랄까, 책이라는 게 뭔가 벅찬 감동이 있는 거 같습니다. 책을 내면 일단 주위에서 걱정하던 사람들이 응원해주기도 하고, 여기저기서 인정도 좀 받고, 자식 걱정하는 부모 마음마저 조금이나마 바꾸기도 하고. 책 한 권 냈다고 갑자기 유명해지고 떼돈 버는 건 아니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로 착실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모습은 정말 멋진 거 같아요. 이제까지 만난 회사 저자들도 그렇고, 오늘 저희가 모신 작가님도 그렇고. 아무튼, 좋네요. 주절주절 홀로 떠들어댔다. 휴대폰 너머로 어머니의 답변이 이어진다. 니 술 뭇나. 아들의 진심 어린 소감문이 술주정으로 들린 걸까. 네, 방금 맥주 한 잔 마셨죠. 사실 세 잔 마셨지만 거짓말 하기로 한다. 아무튼 잘 해봐라. 니 책은 언제 나오노. 빨리 유명해져서 돈 많이 벌어라. 엄마 호강 좀 시켜도. 이제까지 돈보다 더 소중한 걸 배우고 있다며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는데, 어머니의 한마디는 나의 모든 설렘과 감동을 단번에 물질적 가치로 환산해버린다. 네, 어무이. 기다려 보소, 돈 마~이 벌어서 호강시켜 드릴게요. 결국 나 역시 물질적 가치를 내세우며 새하얀 깃발을 치켜든다. 기분 좋은 항복이다.


   집에 도착하니 밤 11시. 매니저 형에게 급한 연락이 와 있었다. 함께 준비 중인 공모사업이 마감 한 시간을 앞두고 있었다. 샤워할 틈도 없이 급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며 기획서를 간신히 마무리했다. 티격대격 대지만, 그런대로 죽이 잘 맞는지 둘이서 이것저것 일을 벌이고 있다. 대부분 돈이 되긴커녕, 오히려 돈과 시간을 쏟아 붓는 일들이다. 이제는 돈 되는 걸 좀 해보자며 도전하기로 한 게 이번 공모사업이었다. 그런데 이것도 조건이 영 별로다. 돈이 안 되는 게 눈에 보듯 빤하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뭐라도 해보려고, 또 이러고 있다. 둘 다 맨날 바쁘고 정신없고 일이 몰릴 때마다 한숨을 푹푹 내쉬지만, 또 이렇게 새로운 일을 벌인다. 둘 다 상태가 영 안 좋다. 이러다 돈은 언제 벌까 싶다. 큰일이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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