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료함의 세계에서 정답이 없는 세계로
"편집자는 그 능력 여하를 불문하고 어떻든 '판단'하라고 월급을 받는 사람이고
판단을 하지 않는다면 사실상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공대를 다녔다. 학교에서 배우고 시험 치는 건 대체로 숫자와 관련 깊었다. 숫자의 세계는 명료했다. 예로 들어 냉·난방시스템의 효율을 구하거나, 공간 크기와 사람 수에 따라 필요한 냉·난방 시스템의 개수 등을 구한다. 정답이 정해져 있다. 제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운 계산 문제라도 결국 정답은 숫자로 딱 맞아떨어진다. 명료함의 세계다. 이 세계에서 몇 년을 머물렀다. 대학 졸업 후 출판사에 들어왔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출판사는 책을 판매해 남긴 수익으로 운영된다.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이다. 책을 판매하는 건 사업의 영역이지만, 책이라는 상품은 문화 영역에 있다. 꽤 머리 아픈 지점이다. 다만 떼돈을 벌기 위해 책을 만드는 경우는 좀처럼 없으므로, 굳이 따지자면 출판사는 문화예술 분야에 좀 더 치우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출판의 중심에 편집자라는 존재가 자리 잡고 있다.
"예컨대 쉼표 하나, 토씨 하나를 넣고 빼는 일에도 주어진 '정답'은 없다. 그저 편집자의 '판단'이 있을 뿐이다."
편집자는 책 만드는 일을 한다. 여기에 있어 많은 작업 과정이 있지만, 가장 화려하고 재밌어 보이는 건 책 제목을 짓는 일이다. 저자가 정하는 경우도 많지만, 중요한 일인 만큼 편집자가 쉽게 양보하지 않는 영역이다. 제목을 짓는 건 매력적이면서도 머리 아픈 일이다. 겨우 단어 몇 개만으로 책을 매력적인 상품으로 만들어야 한다.
조사 하나, 쉼표 하나, 토씨 하나로 느낌이 완전히 달라진다. 책 제목이 무엇이냐에 따라 표지 이미지도, 목차도, 글의 순서도, 구성도 크게 바뀐다. 이토록 막강한 영향력이 있는 만큼 그 책임도 크다. 책 내용이 빈약해도 제목을 잘 지어서 베스트셀러가 된 사례가 제법 있다. 반면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제목이 밋밋해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어떤 제목이 좋은지, 어떤 제목이 독자의 반응을 이끌어낼지 예상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제목에 따라 책의 운명이 완전히 바뀔 수 있다. 또한 책의 운명에 따라 저자의 삶이 바뀌는 경우도 많으니, 어쩌면 책 제목을 짓는 일에 한 사람의 운명이 걸려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 살 떨리는 일이다.
다음으로 ‘부제목’을 정해야 한다. 책 제목을 정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작업이다. 제목이 조금 밋밋하다면, 맛깔 나는 부제목을 통해 책을 살릴 수 있다. 제목이 주는 느낌이 너무 강해서 책을 소개하는 부분이 부족하다면, 책의 내용을 충분히 아우르는 부제목을 통해 보완할 수 있다.
책의 뒷표지에는 보통 프롤로그(머리말) 일부 혹은 본문에서 강조할 만한 글귀 등을 적는다. 추천사를 넣기도 한다. 앞표지가 단어 몇 개만으로 임팩트를 주며 독자들을 유혹한다면, 뒷표지는 책에 대한 적당한 설명을 통해 차분하게 유혹한다고 볼 수 있다.
앞표지와 뒷표지는 표지 이미지, 컨셉, 구성, 폰트 크기 등 신경 쓸 게 많다. 아무리 좋은 카피가 있어도 디자인적인 이유로 넣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 적극 활용할 수 있는 게 바로 띠지다. 아쉬운 부분을 적극 보완할 수 있다. 띠지 문구까지 정해지면 표지 구성은 마무리된다.
이후로도 많은 작업이 남아 있다. 목차를 구성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선 작가가 보내준 글의 순서나 구성을 완전히 바꾸기도 한다. 또한 내용 역시 그저 글만 쭉 나열하기보다 간지, 쉬어가는 타임, 팁 등을 통해 책의 볼륨감을 높이기도 한다. 얼추 책의 형태가 만들어지면 이제 작가가 보낸 원고로 시선을 돌린다. 교정·교열을 본다. 맞춤법이 틀렸거나 오타가 있는 경우 곧장 고치면 된다. 하지만 애매한 순간도 있다. 분명 틀린 문장은 아닌데 어딘가 엉성하다. 고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이 시작된다. 조사를 뺄까, 쉼표를 찍을까, 문장을 한 번 끊을까. 함부로 고쳤다간 향후 문제가 생길 수 있고, 그대로 두면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 결국 이마저도 편집자가 판단해야 하는 부분이다.
"'판단'하는 사람에게는 그 판단에 대한 책임이 있다. 판단하기를 꺼린다는 것은 책임지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제아무리 유능한 편집자라도 영 밋밋한 제목을 지을 때도 있다. 성심성의껏 생각한 카피가 책을 충분히 소개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편집자 경력이 20년, 30년이 되어도 책에 있는 오타를 완벽히 잡아내지 못한다. 완벽함을 추구하지만 완벽해질 순 없다. 제목이든, 책을 소개하는 카피든, 목차 구성이든, 머리를 쥐어 싸맨 채 오랫동안 고민해 봐도 괜찮은 아이디어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경우는 단연코 없다. 그저 마감 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최악과 차악 중에서 간신히 차악을 고를 뿐이다. 자신의 판단이 맞을 거란 보장이 없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믿고 과감하게 판단해야만 한다. 결국 편집자는 판단하고, 그 판단에 대한 책임을 지는 존재인 셈이다.
* 글귀 출처 : 『편집에 정답은 없다』(변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