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이 좋아요.
- 정말이에요?
- 전공자도 아닌데 이 정도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요.
- 고맙습니다. 선생님.
하고 싶은 일 중의 하나가 그림책의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다.
그림을 못 그리니 그리는 것부터 도전해 보고 싶었다.
벼르다가 어렵게 그림책 학교에 들어갔다.
학원으로 분류되지만 수업료가 만만치 않다.
기수별로 한 학기에 25~30명 정도 뽑는데, 우리 기수에서 내가 제일 나이가 많은 왕언니다.
20대와 30대가 가장 많고, 그리고 40대가 2~3명, 그리고 50대 후반인 나.
미술과 관계된 전공자나 디자인 쪽에서 일하는 젊은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문외한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두 명뿐이다. 내가 거기에 속한다.
수채화에 필요한 도구들을 준비하라고 해서 홍대 화방으로 달려갔다.
수채화 코너에 가서 나는 그만 '얼음'이 되었다.
수채화 종이 앞에서, 붓 앞에서, 물감 앞에서 폭넓고 다양한 그 종류에 기가 죽었다.
용어도 생소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처음 마주 대하는 낯섦과 무모한 도전에 자신감이 떨어진다.
직원에게 물어보면서 하나씩 하나씩 나랑 처음 만나는 도구들을 신중하게, 조심스럽게 골라 담았다.
이렇게 화구들을 처음 만나는 일부터 그림 그리기까지 3학기 동안 최선을 다하며 집중했다.
물론 그림에 대한 기술이나 능력, 스킬이 부족해서 다른 친구들보다 많은 시간을 들였다.
때론 내 그림은 어디에서도 배우지 않은 순수한 선과 형태가 있다고 칭찬받기도 했고,
때론 어떤 화가의 롤모델이 없는 그림은 금방 얕은 수준을 드러내게 돼 있다며 질책을 받기도 했다.
걸음마를 시작한 나는 그림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찰나에 벌써 졸업이라고 한다.
얼마 걸어보지도 못했는데, 중간에 길이 끊어져 버렸다.
하고 싶어 어렵게 도전했는데 배웠다고 하기도, 안 배웠다고 하기도 애매모호해진 꼴이 되었다.
그때 참으로 진지하게 그렸던 어린이들의 얼굴과 찌그러진 냄비의 그림들을 그냥 묻어두는 게 미안하고 억울해서 쑥스럽지만 글 위에 걸어두었다. 글과 그림이 맞지 않아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그림 따로 글 따로 봐주어도 좋고, 정. 반. 합으로 봐주어도 좋다.
어차피 작가가 글을 올려놓거나 출간하게 되면 그것은 작가의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독자의 것이 되는 것이므로 어떻게 봐주든 나는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다.
초보자인 나에겐 칭찬이 약이었다.
그것도 그냥 약이 아니라 고단백질에 종합비타민이다.
칭찬의 약을 먹으면 절로 엔도르핀이 솟아 나흘 밤을 새도 끄덕 없을 만큼 에너지가 충천한다.
그런데 좀 더 먹었어야 할 약이 끊어졌다.
약발이 다하자 에너지도 차츰 점멸해가고 막막함이라는 동굴 안에 갇혔다.
나는 아직도 흰 도화지가 두렵다.
무엇을 그리고 싶은데 손이 도화지 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세상엔 달팽이같이 느린 초보자들이 있다.
그런 초보자들에게는 느린 것을 인정하고 기다려주고, 응원해 주고 힘을 주는
달팽이를 이해해줄 달팽이 같은 선생님이 필요하다.
특히 나처럼 나이 들어서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선생님의 존재는, 그 인생의 마지막을 꽃피우게 하는 활력의 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