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사랑 13
준호의 편지7
수진에게,
오늘 네 편지를 받고 오래도록 창밖을 보았어.
한 번만 읽었다는 그 말에서, 나는 네가 전하려는 모든 것을 느꼈어. 예전엔 내 편지를 여러 번 읽어주던 네가, 이제 한 번으로 충분하다고 말한 것. 그 말이 슬프기보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그만큼 우리가 서로에게 선명해졌다는 뜻일 테니까.
네가 내 문장이 더 이상 중간에서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지. 맞아. 나도 그걸 느껴. 처음 편지를 쓸 때는 한 문장을 쓰고도 몇 번이고 지우고 다시 썼어. '이 말이 너무 직설적인가, 너무 멀리 가는 건 아닌가' 하고 망설였지. 그런데 이제는 달라. 너에게 하는 말은, 그냥 그대로 내 마음이니까.
네가 내 글에서 마침표가 많아졌다고 한 것, 나는 그 말을 읽고 내 편지들을 꺼내 다시 훑어봤어. 정말 그렇더라. 예전에는 문장을 쉼표로 이어가며, 말을 아끼고 또 아꼈어. 그런데 요즘은 하고 싶은 말을 그냥 해. 마침표를 찍어도, 네가 다 알아들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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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말한 그 어긋난 기억들.
우리가 각자 기억하는 처음 만난 날의 풍경이 달랐지. 나는 네가 파란 스웨터를 입었다고 기억하고, 너는 네가 하늘색이었다고 했어. 그런데 네가 그걸 바로잡고 싶지 않다고 했을 때,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풀리는 기분이었어.
맞아. 기억은 정확할수록 덜 진실해질 때가 있어. 우리가 함께였다는 사실, 그게 전부인데. 그날 네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보다, 그날 내가 너를 처음 보았고, 그 순간 내 삶이 달라졌다는 게 진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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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내 외로움을 읽어냈다는 것.
외롭다고 쓴 날엔 문장이 길어지고, 괜찮다고 쓴 날엔 말이 빨리 끝난다는 것. 나는 그걸 누군가에게 들키고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편안했어. 너는 내 문장 너머를 읽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걸 알면서도 굳이 숨기지 않았어. 아니, 숨길 수 없었는지도 몰라.
네가 그렇게 읽어주었기에, 나는 점점 더 솔직해질 수 있었어. 쓰고 나서도 지우지 않게 되었고, 부끄러워도 그냥 보내게 되었어. 너에게 부끄러운 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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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네가 조금 늦게 답장하거나, 가끔 놓치더라도 섭섭해하지 말라는 말.
수진아, 나는 그 말을 읽고 웃었어. 네가 벌써 나를 그만큼 알고 있구나 싶어서. 사실 나는 네 편지가 이틀만 늦어도 서성거리곤 했거든. 우체통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고, 집배원이 오는 시간을 외우고. 그런데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나도 좀 느긋해져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람이 늘 같은 자리에 있을 수는 없지.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우리는 각자의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그래도 네가 없는 자리에서 나는 여전히 너를 생각할 거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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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이 편지를, 내가 혼자서도 하루를 잘 마칠 수 있을 거라고 확신이 들었을 때 보냈다고 했지.
수진아, 나는 오늘 네 편지를 받고 확실히 알았어. 나는 이제 혼자서도 하루를 잘 마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구나. 아니, 네 덕분에 그렇게 되었구나.
네가 내 삶에 다시 들어온 그날부터, 나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어. 아침에 눈 뜨는 게 기다려지고, 우체통을 보는 게 설레고, 글을 쓸 때 네 얼굴을 떠올리게 되었어. 그 모든 것이 나를 살아 있게 했어.
그러니까 수진아, 네가 이제 조금은 내려놓아도 돼. 나는 괜찮아. 네가 심어준 그 마음이 내 안에서 자라고 있어. 혼자서도 하루를 잘 마칠 수 있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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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동네 산책길에 벚나무를 봤어. 아직은 앙상한 가지지만, 자세히 보니 작은 꽃눈들이 맺히기 시작했더라. 나는 그 앞에 서서 한참을 바라봤어. 저 꽃눈들이 터지면, 우리 만나기로 한 봄이 오겠구나 싶어서.
그날이 오면, 나는 너에게 말할 거야. 고맙다고. 이 겨울 동안 나를 살게 해줘서. 네 편지 한 장 한 장이 내게는 생명이었다고.
그리고 그날 이후로도, 나는 계속 편지를 쓸 거야. 만나고 나서도, 또 그다음에도. 편지는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말하기 방식이 되었으니까.
늘 네 편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걸 잊지 말아줘.
2025년 2월, 봄을 기다리며
준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