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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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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ma May 03. 2024

사랑에 대하여

제목부터 오글거린다.

‘사랑’이라니 입밖에 내어 소리 내어 말하기 조금 부끄럽다.

어쩌면 러브러브 남녀 사랑이랑 다를지도 모르겠다.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은 ‘할머니’였다.

어째서 부모님이 아닌가 하면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나의 주 양육자

내 스승, 내 친구, 내 엄마

내 유년시절부터 20대 초반까지

모든 것이었던 사람이다.


아직도 할머니와의 기억은 단편적으로 선명하게  남아있는데 아이스크림 상자를 사람모양으로 오려서 나무 막대에 붙어서 인형극을 해줬거나 할머니의 지점토 장비로 지점토로 국수 뽑듯 인형의 머리카락을 만들어 붙이고 놀았던 기억 등이다.


할머니는 나랑 결이 비슷한 사람이었다.

생각이 많고 수줍었고 남에게 폐 끼치는 걸 극도로 싫어하고 자기도 노인이면서 노인을 싫어하고 어린아이를 사랑하는 특이한 노인이었다.

둘 다 책과 그림을 좋아해서 함께 토론하고 소통했다.

할머니도 나를 손녀보다는 단짝 친구처럼 이런저런(때론 안 해도 될 며느리 욕 등) 많이 이야기했고 생각과 감상 많은 것을 공유했다.

소울메이트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할머니는 정말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는데 내가 일본에서 유학 중 갑자기 소식을 들었다.

어떤 정신으로 뛰어가서 탑승게이트를 지나 비행기에 타서 서울의 장례식장까지 날아갔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갑자기 두통을 느껴 쓰러졌고 그대로 돌아가셨기에 우리 모두 충격이 컸다.

살면서 가장 많이 크게 엉엉 울었다.

어떤 사랑하는 사람은 이렇게 하루아침에 지워버리듯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배웠다.


감정은 남아있지만 대상이 없어서 마음이 갈 곳을 잃어서 할머니를 떠올리면 눈물이 툭 난다.

그런데 이 감정은 슬픔이 아니라...

그리움과 고마움 그리고 사랑이라고 뒤섞인 부정적이지 않은 감정이다.


본래 겉은 무뚝뚝하고 애교라곤 전혀 없는 성격인데 할머니에게만큼은 사랑한다는 표현도 많이 말했고 포옹도 많이 하고 편지도 정말 많이 썼다.

할머니도 나에게 답장을 꽤나 열심히 써줬는데 그래서인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많은 짐에는 거의 내 편지들이었고, 지금도 집 곳곳에서 유물처럼 할머니의 편지들이 나온다.


최근에도 할머니 편지를 발견했는데 내가 일본에 가기 전에 받은 할머니의 마지막 편지였다.

이렇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고, 마음껏 사랑을 한 존재가 있었다는 건 무척이나 특별하다.

지금도 자존감이 떨어질 때나 불행하다고 느낄 때 할머니의 편지를 보면 나를 열렬하게 지지하고 사랑해 줬던 사람이 있었다는 기억으로 행복해진다.


그리고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돌아가신 후에 못해준 거나 아쉬움 같은 응어리 같은 게 전혀 남지 않았다.

아낌없이 표현하고 받았기 때문에 할머니와 나는 최선을 다해서 서로를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할머니의 장례식 이후에 오랜만에 한국에 온 김에 엄청나게 많이 먹고 또 울고 또 웃기도 하면서 상실 후에도 다시 일상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도 할머니를 생각하면 행복하기도 하고 눈물도 나지만 남기고 간 기억들을 가끔 꺼내보고 엄마와 할머니 이야기하기도 한다.


요약하기 힘들지만 나에게 사랑이란 이런 느낌이다.

아픔이 아니라 사랑받았다는 기억이 온기로 남아서 나에게 지반이 되어주고 용기를 준다.

사랑은 내가 쥐고 있는 게 아니라 상대방에게 주어야 나도 행복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사랑을 주고 표현할수록 후회가 남지 않고 오히려 행복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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