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노와 절망 사이에서, 다시 내 아이를 바라보다
"○○이를 찬찬히 떠올리면서 ○○이의 장점이나 예쁘고 사랑스러운 점을 50가지 적어보세요."
"네? 50가지를요?"
스님께서 책상 위에 A4 용지 한 장과 연필 한 자루를 건네셨다.
순간 나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졌다.
단 한 가지도 찾기 힘든데 50가지라니, 깊은 한숨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코로나 기간 동안 ADHD 사춘기 아들과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틀어져버렸다.
친정아빠와도 마찬가지였다.
엘리베이터를 사이에 두고 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사실 아빠는 우리가 바로 앞집으로 이사를 오는 것도 몹시 못마땅해하셨다.
결혼과 이혼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난 아빠에게 딸로서 모든 신망을 잃었다.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게임에만 빠져 있는 아들보다
나를 더 힘들게 했던 사람은, 바로 아빠였다.
엄마가 제대로 훈육하지 않아 아이들이 버릇이 없는 거라며
모든 화살을 나에게 돌리셨다.
집에서도 매번 비슷한 패턴으로 사달이 났다.
엄마에게 함부로 하는 ○○이를 볼 때마다 아빠는 불같이 화를 내셨다.
발끈한 ○○이도 이에 질세라 두 눈을 부라리며 험한 말로 마구 대들었다.
참고 참다 끝내 나도 이성을 잃고 폭발했다.
결국 ○○이는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변했다.
보다 못한 스님 동생이 두 번째 상담을 권했다.
명상심리상담사 스님께서 8회기로 진행하신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센터가 너무 멀어서 전처럼 집에서 다닐 수가 없었다.
망설임 끝에 4박 5일 일정으로 난생처음 아이들과 헤어져 집을 떠났다.
절박한 심정으로 살기 위해 내린 마지막 결정이었다.
상담센터가 있는 절에 무사히 도착하여
욕실이 딸린 작은 방에 짐을 풀면서도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그 얼마나 간절히 원했던 나 혼자만의 시간인가.
홀가분한 마음으로 고즈넉한 사찰 주변을 산책하며
시간이 이대로 멈추기를 바랐다.
하지만 상담 첫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이의 장점을 50가지 써서 제출해야 했다.
입에 거품을 물고 반항하는 ○○이의 모습만 떠오를 뿐
도무지 좋은 점이 생각나지 않았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스님께 사실대로 난감함을 토로했다.
"곰곰이 잘 생각해 보면 장점이 왜 없겠어요?
눈도 예쁘고, 귀도 예쁘고 손가락, 발가락도 예쁘고요."
스님 말씀에 힌트를 얻어
아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칭찬하며
흰 종이를 일사천리로 채워나갔다.
그 후로 하루에 2회기씩 4일 동안 체계적인 명상심리 상담이 이루어졌다.
나의 성격 유형, 가족관계, 가족 역할극, 상처받은 내면 아이와의 만남,
근본적인 화의 원인, 화가 날 때의 대처방법, 다양한 명상법 등을
실전과 더불어 배울 수 있었다.
마음을 터놓고 심도 있게 이야기 나누는 귀한 시간이었다.
하루하루가 정말 꿈결처럼 흘러갔다.
탁 트인 정원 테이블에 앉아 향기로운 차를 마시며
스님과 대화를 주고받고 있으려니,
너무나도 행복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덕분에 또다시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갈 용기를 얻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불안감이 올라왔다.
과연 잘할 수 있을까?
나의 인기척에도
아들의 방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라는 걸,
그제야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