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국밥 한 그릇

by 힘날세상

뚝배기에서 우윳빛의 뽀얀 국물이 팔팔 끓고 있다. 얇게 저며 올려놓은 소고기가 춤을 추며 뽀글거리고 있을 때, 숭덩숭덩 잘라 넣은 대파도 덩달아 제 몸을 떨고 있다. 뜨거운 김이 한꺼번에 피어오른다. 아주 진한 고소함을 가득 품은 냄새가 어린 시절 시골 학교의 종소리처럼 퍼진다. 한여름인데도 뚝배기를 감싸고도는 따뜻한 느낌이 도탑게 스며든다. 기분이 숲 속에 펼쳐져 있는 호수의 잔잔한 수면만큼이나 부드러워진다. 평안하다.

점심때가 조금 지난 시각인데도 여기저기 탁자에 흩어 앉아 사람들이 늦은 점심을 즐기고 있다. 국밥의 뽀얀 국물에서 피어나는 고소함 위에 막걸릿잔을 올려놓은 사람, 시큼한 배추김치에 부드러운 고기를 더해 소주잔을 기울이는 사람, 건축 현장에서 온몸으로 햇볕을 다 받아내고는 얼큰한 한우 내장탕으로 그 땀을 닦는 사람, 그에게 막걸리 한 잔을 가득 부어 주는 사람, 입이 미어지게 밥을 한 숟갈 퍼넣고 깍두기를 우걱우걱 씹는 사람, 아내의 뚝배기에 고기를 덜어주며 흐뭇한 비소를 짓고 있는 백발의 노인, 시집간 딸의 살림을 도맡아 꾸려주고 있는데 두 살배기 손자가 피로를 다 씻어준다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여자분, 에어컨 밑 구석진 탁자에 혼자 앉아 아무 말 없이 뜨거운 국물을 훌훌 들이마시는 청년. 국밥집은 울긋불긋한 삶의 이야기를 펼쳐 놓고 있다.

폭염 경보가 내렸다. 열대야가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한낮에는 밖에 나갈 엄두도 못 낼 정도이다. 고층 아파트라서 앞뒤 문을 다 열어 놓고 대자리 위에 누워 있으면 서늘한 바람이 휘감고 돌아 쾌적하기는 하다. 그러나 여름은 여름이다. 입맛이 싹 달아나 버렸다. 매일 밥상을 차리는 아내는 죽을 맛일 거다. 그래도 있는 반찬, 없는 반찬 꺼내어 어떻게든 먹게 해 보려고 참 애쓴다.

늙었나 보다. 식욕이 무뎌졌다. 둘이 앉아 밥 먹은 지가 꽤 오래되었는데 은퇴하면서 급격히 밥맛이 떨어졌다. 어쩌다가 아이들과 같이 밥상에 둘러앉으면 어우렁더우렁 맛나게 먹는다. 그렇다고 자기 일에 바쁜 자식들을 매번 불러들일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런 까닭에 우리의 식탁은 굳어버린 밀가루 반죽처럼 딱딱하다.

틈만 나면 점심은 나가서 먹기로 했다. 전주에 살 때는 입에 맞는 음식점이 많아서 별 고민 없이 밥을 먹었다. 시래기를 듬뿍 넣은 민물고기 매운탕, 진하고 진한 콩물이 일품인 콩국수, 어떻게 그런 맛을 내는지 알 수 없는 삼선 간짜장, 두툼하게 돼지고기를 썰어 넣은 청국장, 진하고 고소한 국물이 넘치는 추어탕, 고구마순을 산처럼 쌓아주는 감자탕, 녹차 먹여 키운다는 삼겹살, 무엇부터 먹어야 할 줄 모르는 채식 뷔페, 값은 싼데도 먹을 것이 많은 허름한 백반, 비닐장갑 끼고 뜯어먹는 매운 족발, 참 이상하게 끌리는 콩나물국밥.

낯선 동네라서 맛집을 찾아가는 걸음이 언제나 더디다. SNS에 몸을 기대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만난 짜장면집은 전주의 맛 이상을 보여 줬다. 만족하였고, 중독되었다. 국산콩으로만 만든다는 콩요리, 매콤함이 손짓하는 명태탕, 차타고라도 달려가는 생선구이와 양고기,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맛을 본 소머리 국밥.

국밥집은 들어서는 순간 고소함에 휘둘린다. 국밥집이란 게 좀 허름해야 제맛이기는 하다. 내오는 뚝배기 가장자리에 고춧가루도 좀 묻어 있고, 깍두기를 담은 접시 한쪽이 금이 가 있으며, 제대로 닦지 않은 탁자에 먼저 먹은 사람이 흘린 국물이 좀 묻어 있는. 손바닥만 한 의자에 비집고 앉으면 옆 사람 엉덩이와 마주 닿는, 그런 복작복작하고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밥맛을 돋아주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옛말이 되었다. 식당들이 세련된 모습을 연출하면서 국밥집들도 턱시도를 갖추어 입은 듯 말끔해졌다.

신발을 벗고, 가지런하고 널찍널찍하게 놓여 있는 탁자에 앉았다. 깨끗한 길가에 쓰레기를 못 버리듯이 슈트를 입고 있는 듯한 식당은 조용조용하고 클래식 음악이 흐를 듯한 느낌이 가득하였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서민 음식인 국밥 한 그릇을 먹는데도 무언가 대접을 받는다는 느낌은 100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집으로 가는 아이의 심정이 아닐까. 괜히 기분이 좋고, 은근한 즐거움이 솟아나는.

‘국물맛이 끝내줘요’라는 광고가 있었던가. 정말 국물맛이 끝내준다. 이런 맛을 내기 위해 주인은 얼마나 애를 쓸까. 느닷없이 서정주 님의 시가 생각났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랬을 것이다. 이런 국물맛을 내기 위해 부엌에서 동분서주하고 있는 주인은 어둑새벽에 식당의 불을 밝혔을 것이다. 먹는 사람의 즐거움을 위해 그는 자신의 잠을 덜어냈을 것이다.

슈트를 입고 깊은 맛을 풍기는 음악을 들으며 국밥을 먹는 기분이다. 폭염 경보가 온몸을 짓누르고 있어도 마음은 시원하다. 편안하다. 평안하다.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