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할아버지, 할아버지집에 가도 돼요?
ㅡ할머니, 빨간 고기 해주세요.
몸도 피곤하고, 졸리기도 하다. 그래서 ‘낮잠이나 좀 자볼까’하고 누워 있는데 손주들이 전화를 했다.
소파에서 뛰어내리고, 식탁 의자를 빼어 놓고 차박용 이불 다 끄집어내어서 여기저기 막고, 두르고 해서 동굴같이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들어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시시덕거릴 게 분명하다. A4용지 다 꺼내서 그림을 그리고 ‘할아버지 사랑해요’, ‘할머니 보고 싶었어요’ 편지를 써댈 것이 뻔하다. 안방으로 현관으로, 뒤 베란다로 돌아다니며 숨바꼭질을 하자고 할 것이다. 일곱 살짜리 손자 녀석은 체스판을 가지고 와서 그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가며 그 뛰어난 체스 실력으로 체스판 위의 내 말들을 괴롭힐 것이다.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야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일이 손주들과 같이 놀아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좋고 또 좋다.
ㅡ 지아, 은지, 승연이가 있는데 지호는 누가 가장 좋아?
ㅡ 당연히 승연이죠.
ㅡ 승연이는 다른 유치원으로 갔는데도?
ㅡ 그래도 제일 좋아요.
손자는 애늙은이다. 정말 이 아이에 몸속에는 70 먹은 영감이 하나 들어 있다. 하는 말이 보통이 넘는다. 축구교실이 끝나고 돌아오려면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 앞을 지나와야 한다.
ㅡ지호야, 아이스크림 사줄까?
ㅡ네, 좋아요. 그런데 마음대로 사도 돼요?
ㅡ그럼, 지호가 원하는 만큼 사도 되지.
바구니를 들고 다니며 마구 퍼 담는다.
ㅡ누나, 이럴 때 비싼 걸로 많이 사야 해.
ㅡ너무 비싼 것만 많이 사면 안 되지.
ㅡ엄마는 돈이 없는데, 할아버지는 돈이 많잖아. 그러니까 비싼 걸 많이 사야 해.
제 엄마는 뭐 사달라고 하면 돈없다며 안사주려고 하고, 할아버지는 사탈라고 말만 하면 무조건 사주기 때문에 이 아이는 내가 돈이 많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ㅡ할머니, 빨간 고기 주세요.
집에 오자마자 먹을 것 타령이다. 암, 그래야지. 잘 먹어야지.
빨간 고기는 제 삼촌이 잘해주는 돼지 쪽갈비 구이를 말한다.
ㅡ그럼 해놨지.
ㅡ블루베리도 주세요.
손녀는 며칠 전부터 먹고 싶다고 하던 블루베리를 찾는다.
아이들과 같이 먹는 밥은 언제나 즐겁다. 시시덕거리며 그 여린 입으로 오물오물 먹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밥을 실컷 먹고 사과, 토마토까지 한 바탕 먹고
물러났다.
작은 방 이불장을 열고는 차박용 이불을 꺼낸다. 거실 바닥에 하나씩 깔아 놓고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조잘대고 논다.
ㅡ엄마, 오늘 할아버지집에서 자고 가면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좋아하시겠지?
ㅡ그럼 좋아하시지.
ㅡ엄마는 가고, 우리들은 여기서 자고 가는 거 어때?
참 별 일이다. 일이 바쁜 엄마는 보내고 자기들은 자고 가겠다는 생각을 하다니.
ㅡ그 대신 내일 엄마가 우리 데리러 와야 해.
ㅡ짜장면도 사줘야 돼.
ㅡ아빠도 같이 와야 돼.
ㅡ할아버지, 영화 하나 봐도 돼요.
ㅡ무슨 영화를 볼까?
넷플릭스에서 이리저리 리모컨을 돌리더니 영화를 재생한다. ‘오늘부터 히어로’ 지구를 지키는 부모들이 외계인들에게 잡혀가자 초능력을 가진 아이들이 외계인들을 물리치고 부모들을 구해낸다는 내용이다.
ㅡ우리도 엄마, 아빠를 구해낼 수 있을까?
ㅡ당연히 구해내야지.
진지하게 영화를 보더니 자기들끼리 수군거린다.
ㅡ누나, 진짜 외계인이 쳐들어오면 어떡해?
ㅡ외계인들은 좀 무섭게 생겼지만 그래도 착한 외계인도 있을 거야.
ㅡ그럼 착한 외계인들은 우리를 공격하지 않아?
ㅡ그렇겠지. 착한 외계인이니까.
ㅡ히히, 나는 외계인하고 체스를 하자고 해야지.
ㅡ외계인을 앉혀놓고 그림을 그려주는 거야. 좀 예쁘게 그려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ㅡ어린이 외계인들은 싸움보다 놀기를 더 좋아할 걸.
ㅡ누나, 외계인들도 우리 같이 유치원도 다니고, 좋아하는 친구도 있을까.
ㅡ그럴 거야. 외계인들도 우리와 똑같이 생각도 하고, 말도 하잖아.
ㅡ외계인들과 우리 축구교실 친구들이랑 축구하자고 해야지.
ㅡ재밌겠다. 줄넘기 대결도 하자고 할까.
ㅡ좋아. 나는 50개도 넘게 하니까 내가 이기지 않을까.
아이들은 참 순수하다. 싸움보다는 같이 놀 생각을 먼저 한다. 아이들이 읽는 책이 그런 내용이기 때문일 거다. 이렇게 순수한 아이들을 어른들은 잘 보호하고 양육해야 하는데, 세상은 그렇지 못하니 걱정이다. 나쁜 생각을 하지 않고 즐겁고, 재미난 생각들로 가득한 이 아이들이 이대로 자랐으면 좋겠다. 어른이 되어서도 지금과 같은 착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옆에서 큰 대(大) 자로 팔다리를 뻗고 쌕쌕거리며 자고 있는 손자를 바라본다. 이 아이가 세상을 헤쳐나갈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 지구촌 사람들이 아니라 외계인들과도 같이 줄넘기를 하고, 체스판을 마주 놓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세상이 꼭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