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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Mar 23. 2024

7화 나 혼자 산다

짧은 소설 같은

옥룡설산 선자두주봉(2012년 산행 사진)



    

해발 4,900m 녹설해綠雪海에 오르자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바람이 몰아쳤다. 풀 한 포기 없는 바위 능선에 허리 높이의 눈이 쌓여 있다. 등으로 바람을 맞으며 웅크리고 앉아 다리 쉼을 한다. 뽀송뽀송한 발가락을 쾌감을 느끼며 여기저기 몸 상태를 점검해 본다. 호흡이 거칠기는 했지만 괜찮다.    

  

가지고 있는 돈을 상당 부분 덜어 윈난성 옥룡설산을 오르는 것은 다시 한번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든다.      


군복을 벗을 겨를도 없이 공사판으로 뛰어들었다. 내가 가진 것은 기술이 아니라 젊은 몸뚱이 하나였다. 그야말로 막노동이었다. 상고를 졸업하였기에 회사 경리직으로 들어가기는 쉬웠으나 책상에 앉아서 펜대를 굴리는 일은 할 수 없었다. 그저 몸을 놀려서 하는 것이 좋았다. 공사판이 제격이었다. 숱한 꾸지람을 들어가며 철근 일을 배웠다. 내가 따라다니던 김 영감님은 자신의 기술 전부를 전수해 주었다. 술집에서는 이론으로, 현장에서는 실습으로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6년을 땀 흘리며 도면을 보고 시공할 수 있었다. 일당이 거의 배로 올랐다.


그때 아내를 만났다. 산비탈에 있는 작은 방에서 살림을 시작했고, 아들을 낳고, 유치원에 보내면서 우리는 산비탈에서 내려와 독채를 얻어 살 수 있었다. 행복을 통통 튀기며 하하 호호 즐거울 때 꿈에 그리던 D 건설 직원이 되었다.      


녹설해에서 우리가 오르려고 하는 옥룡설산의 선자두주봉으로 가는 길은 가파르지는 않았으나 바람이 너무 불었다. 예리한 면도칼로 얼굴을 긋는 듯한 아픔이었다. 한 발을 걸어 들숨을 쉬고, 한 발을 내디뎌 날숨을 쉬었다. 빠르게 걸으면 안 되었다. 고소증에 빠져들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짓이었다. 느리게 걸어서 정상에 오르는 것이야말로 옥룡설산 같은 고산을 오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욕심이었다. 어쩌면 하나의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두바이 건설현장에 지원한 것은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었지만 결론적으로는 내 삶을 방향을 비틀어버린 운명적인 선택이었다.


동남아시아에서 모집해 온 노동자 15명을 이끌고 현장을 누벼야 하는 팀장의 직책은 하루하루가 외줄을 타야 하는 것 같은 긴장의 나날이었다. 열심히 일했고, 많은 돈을 벌었다. 6년만 고생하면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집 한 채는 살 수 있을 것이다. 기대감으로 힘든 몸뚱이를 다독이며 뜨거운 햇볕을 견뎌냈다.      


선자두주봉은 바로 코앞에 있는데 아무리 걸어도 그 자리인 것 같았다. 도대체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숨이 가쁜 몸뚱이만 칼바람에 내던져졌다. 녹설해에서 해발 700m를 올라야 하는 정상은 흉측스럽게 바라보였다. 앞에서 걷는 가이드의 걸음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5년의 중동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작은 건설회사를 창립하였다. D 건설에서 던져주는 일을 받아서 하기에도 정신이 없었다. 정말 신나게 돈을 벌었다. 아니 돈을 긁었다. 긁고 또 긁었다. 방 안에다 쌓고 또 쌓았다. D 건설 하청업체가 아니라 나 스스로 공사를 수주하고 정말 무섭게 돈을 벌었다.


호사다마라고 하던가. 돈 벌기에 바빴던 우리가 어디 IMF 사태 같은 것을 예측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공사대금을 받지 못하게 되고 자재 대금은 결제해야 하고. 정말 회사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필 그때 교통사고를 당해 5개월을 병원에 누워있었다.      


아내는 없었다. 아내는 있었는데 내가 알고 있었던 아내는 없었다. 그 많은 돈을 쌓아 놓았던 안방은 텅 비어 있었고, 아내가 아닌 아내가 앉아 있었다. 허망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오후 3시가 되었다고 가이드는 하산을 종용했다. 해발 5600m 선자두주봉이 눈앞에 있는데, 3,670m 전죽림에서 3시간 30분을 피땀을 흘리며 올라왔는데, 바로 코앞에 있는 정상을 못 올라가게 한다. 되돌아 내려가라고 한다.      


ㅡ산은 발로 오르는 것이 아니오. 마땅히 마음으로 오르는 것이오. 정상만을 고집하지 마시오. 올라오면서 당신의 마음에 담았던 시간과 그 많은 상념을 돌아보시오. 정상이 아니더라도 오늘 당신이 올라온 걸음은 큰 의미가 있는 것이오. 내려갑시다. 내려가면서 당신이 올라온 길을 되밟아 보시오. 올라오면서 당신이 생각한 것들을 되새겨보시오. 그것이 힘겹게 산을 오르는 이유인 것이오.      


혼자가 되었다. 누구도 없는 옥탑방에서 며칠을 누워있었다. 낮 동안 쓰러져 잠을 잤고, 캄캄한 밤에 우두커니 앉아 벽을 바라봤다. 물을 마시다가 눈물도 같이 마셨고, 화려한 불빛을 깔아놓고 시시덕거리는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때 많은 시간을 죽음을 생각하며 보냈다. 밝아오는 창틈으로 스며들어온 바람을 맞으며 몸을 일으켰다.      


내가 데리고 있던 사람의 밑에서 일을 했다. 아무렇지 않았다. 좋았다. 일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하루 일하면 20만 원(세금을 떼고 나면 19만 3천 원)을 받았다. 이틀만 일하면 방값을 낼 수 있었고, 하루 더 일하면 일주일을 먹고살 수 있었다. 한 달에 20일을 일하고 나면 돈이 남아돌았다.


내가 벌어 나 혼자 쓰는 것이 참된 행복이었다. 누구도 생각하지 않고 나 혼자 살았다. 오직 나 혼자만 돌아다니고,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내가 가고 싶을 때 어디든 내 맘이 끌리는 대로 가고, 자고 싶을 때 누워 자는 것은 사전에 나와 있는 그대로의 행복이었다.      


      행복幸福 :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     


녹설해에서 전죽림을 내려서는 길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내리막이었다.

ㅡ 여기를 어떻게 올라왔을까.

나는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잔자갈이 깔려 있어서 발을 디딜 때마다 미끄러졌다.      


한 달을 벌어서 두 달을 살았다. 두 달을 벌어서 다섯 달을 살았다. 돈은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다. 봉투에 500만 원을 넣어 놓고 ‘장례비’라고 써 놓았다. 또 다른 봉투에 500만 원을 넣어 놓고 ‘수고비’라고 써 놓았다. 둘을 한 데 묶어 놓고 꼭꼭 싸매 놓았다.


버는 족족 마구 썼다. 정말 비싼 배낭을 샀다. 오스프리 UNLTD AG64. 700 달러이니까 거의 100만 원에 육박하는 돈이었다. 전혀 아깝지 않았다. 서울까지 직접 가서 맞춘 수제 등산화, 고어텍스로 만든 재킷, 몬스터 같은 상표의 바지, 당시 최고급이었던 순토 시계, 모든 것을 명품으로만 샀다. 일이 없을 때는 산으로 돌아다녔고, 120만 원짜리 1인용 텐트를 짊어지고 산등성이에서 잠을 잤다. 다시 말하지만 행복이었다.


히말리아 트레킹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돌로미테를 걸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한 달을 보내며 자유의 본질에 상당히 접근했다. 중국의 5악(동악 태산, 남악 형산, 서악 화산, 북악 항산, 중악 숭산)에 올라 혼자만의 세상을 호령했다.


방안은 좁았지만, 나는 자유로웠고, 책상 서랍에 넣어둔 두 뭉치의 돈을 생각하며 내 마음대로 세상에 색칠을 했다. 붉은색을 칠하기도 했고, 파란색을 섞어 보기도 했다. 재미있었다. 창문을 닫아 놓고 며칠 동안 칩거하며 과테말라산 커피를 마시며 소설을 읽기도 했다. 좋았다.     


나이가 들면서 일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를 불러주지 않았다. 어쩌다가 부를 때에는 일당을 깎으려 들었다. 불러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하게 받아들이라는 투였다.


ㅡ내가 생각했던 때가 되었구나.


70이 넘어가면서부터는 병원에 일절 가지 않는다. 건강검진을 받지 않은 지도 5년이 넘었다. 몸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마음은 편하다. 책상 서랍에 들어 있는 돈뭉치 옆에 소중하게 어떤 것을 하나 더 챙겨 넣어 두었다. 혹시라도 몹쓸 병이 찾아와 그로 인해 견디지 못할 통증에 짓눌리게 되는 경우 사용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눈을 감으면 될 것이다.     


어제는 3층에 사는 젊은이와 술을 마셨다. 아니 마시게 되었다.

쿵쿵거리는 소리에 못 참고 3층으로 올라가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 그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젊은이들 말로 참 쪽팔렸다. 미안해서 술이나 한잔하자고 했는데 젊은이는 쉽게 따라나섰다.      


ㅡ사람 사는 게 말이야, 참 웃기는 것이더라고.

ㅡ그렇죠, 웃기죠. 네, 웃기는 것이더라고요.

ㅡ그렇지? 진짜 웃기는 거지?

ㅡ그렇지요? 진짜 웃기는 거죠?     


그렇게 말했지만 우리는 한 번도 웃지 않았다. 젊은이는 세상이 재미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늘 감옥에 갇힌 것처럼 암울하고 어둡다고 했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하려다가 얼른 입을 닫았다. 젊은이는 어깨를 펴고 살았으면 했다. 그를 안아줄 사람과 시시콜콜 들숨날숨을 나누며 그냥 마주치는 현재를 재밌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미래보다는 눈앞의 현재를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carpe diem’ 같은 거창한 말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냥 파스라도 서로 붙여주면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웃었다.     

나는 그와 술을 마시면서 책상 서랍에 넣어 둔 두 뭉치의 돈에 대해 말을 할까 망설이다가 그만두었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들여다보는 두 뭉치의 돈과 어떤 물건에 대해.      


녹설해에서 전죽림으로 내려오는 길은 올라갈 때보다 더 힘들었다. 그렇다. 사람살이도 그렇다. 젊었을 때보다 늙었을 때가 사는 게 훨씬 어렵다. 어떤 기대감도 없는 걸음이다. 산행은 언제나 하산하는 시간이 힘들었다. 마음은 편한데 몸이 힘들었다. 그리고 약간의 허탈감이랄까, 조금 더 걷고 싶은 미련 같은 것들이 하산할 때마다 휘감아 왔다.      


돌아가면 위층 젊은이와 술을 한잔해야겠다. 그리고 그 젊은이에게 책상 서랍에 넣어 둔 것들에 대해 말을 해야겠다. 또 말하지 못하고 술잔만 들어 올리겠지만.     


사람 사는 것은 참 웃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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