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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Mar 09. 2024

5화 거기에도 빵집이랑 옷가게가 있나요?

      AI  Copilot이  그려준 그림

   






어둠이다. 먹물같이 짙은 어둠 속으로 신작로가 곧게 뻗어 있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신작로가 보인다는 것이 신기하다.      


어릴 때 동네 옆으로 신작로가 생겼다. 하루에 세 번 흙먼지를 일으키며 낡은 버스가 털털거리며 지나갔다. 버스 뒤꽁무니에서 흘러나오는 냄새가 좋아 멀어져 가는 버스를 따라 뛰었다.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풀썩풀썩 먼지를 일으키며 허전한 걸음으로 되돌아왔다. 어른들은 신작로를 따라가면 더 큰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고 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집도 있고, 예쁜 옷을 주렁주렁 걸어 놓은 옷가게도 널려 있다고 말했다. 신작로를 따라가면 만날 세상은 그야말로 신세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작로를 따라 산모퉁이를 돌아가지는 못했다.      


어둠 속에서도 오롯이 드러나 있는 신작로. 신작로를 걸어가야 한다. 완전한 어둠을 꿰뚫고 이어진 신작로의 끝이 어디일까 생각했다. 거기에도 빵집이 있고, 옷을 팔고 있는 가게가 있을까.        

   

ㅡ어머니, 다 잊으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가세요.

어절語節의 골짜기마다 슬몃슬몃 울음이 섞인 아들의 목소리다.

ㅡ아가, 울지 말아라. 내가 베풀어 준 것도 없는 세상에서 힘들게 사는 게 마음이 쓰이는데, 이제는 울지 말아라. 그래도 네 색시가 알뜰하니 잘 보듬어 주어라. 진수랑 진호가 있어 그래도 엄마는 안심이다. 자식이 잘되었다고 얼마나 덕을 보겠느냐만 자식이 잘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사는 힘이 나는 것 아니더냐. 그러니 너도 이제는 너희를 위해 돈도 쓰고, 진수 에미 챙겨가며 잘 살아라. 맛난 것도 먹여주고, 좋은 옷도 입혀 줘라. 그런 색시 어디에도 없다. 그게 이 엄마의 마음이다. 이청준의 소설 <눈길>이 자꾸 생각나는구나. 나는 그런 어미가 되지도 못했으면서 말이다. 아들, 항상 힘내고 즐겁게 살아.


ㅡ어머니, 제가 잘못한 게 너무 많아요. 다 용서해 주세요. 정말 엄마와 딸처럼 지내고 싶었어요. 제가 너무나 부족한 며느리였어요. 죄송해요. 어머니 편안히 가세요.

ㅡ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고생만 하고 사는 우리 이쁜 며느리. 내가 왜 너를 모르겠느냐. 시어머니라고 너에게 해 준 게 없어서 미안하구나. 니 손가락에 다이아 반지 하나 꼭 끼워주고 싶었는데 두고두고 아쉽다. 그래도 받은 걸로 해주면 좋겠구나. 너도 곧 며느리를 들일 텐데 너는 좋은 시어머니가 될 거라고 나는 믿는다. 애비가 받아오는 얄팍한 월급봉투 손에 쥐고 남편에 자식들 챙기느라 정작 너에게는 쓰지 못하면서도 내 생일이라고, 어버이날이라고 다 챙겨주고, 명절 때마다 군말 없이 웃는 낯꽃으로 대해줘서 참 고맙다. 용서하라고? 시아버지 병원비가 모자라 쩔쩔맬 때, 진수 등록금 내야 한다고 내놓지 않은 것 때문에 그런 말하는 거지? 괜찮아.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나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조금도 서운하지 않다. 어미가 자식새끼 생각하는 거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절대로 마음 쓰지 말아라. 진수 에미야, 정말 미안하구나. 미안하다는 말밖에 못 하는 내가 정말 밉구나. 진수 에미야, 너는 참 좋은 며느리였다. 무엇보다 시집 식구들을 진심으로 대해 주었잖아. 너는 훗날 크게 복 받을 거다. 그동안 고마웠다.


ㅡ엄마, 이 세상 미련은 다 버리시고 좋은 데로 가서 아빠랑 영원히 잘 살아.

딸은 기어이 울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ㅡ그래. 울어라. 이때 아니면 언제 몸을 흔들어가며 울겠느냐. 엄마 생각에 운다는 핑계 삼아 실컷 울어서 네 가슴에 맺힌 것을 타 쏟아내어라. 그래도 김 서방 뒷바라지 잘하고, 아이들 잘 다독여라. 자식들이 힘든 세상 살아가는 뒷배가 아니겠느냐. 사업이 힘들어도 내색을 잘하지 않는 김 서방을 네가 아니면 누가 안아주겠느냐. 우리 딸, 잘 살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네 올케언니한테 잘해라. 그동안도 큰 탈없이 지냈으니 잘할 거라고 믿는다. 세상에 그런 올케 어디 없다. 나 없어도 전처럼 사이좋게 잘 지내. 알았지. 고등학교 때 우리는 참 많이도 싸웠었지. 사춘기를 지나는 너와, 그것을 받아주지 못한 이 엄마 때문에 말이야. 그런데 그게 다 훗날을 살아가는 약이더라니까. 그 약발로 네가 비뚤어지지 않았고, 이렇게 곱게 잘 커줬잖아. 우리 이쁜 딸. 이제 물 닦고 김 서방이랑 잘 살아. 그래도 여은이랑 여진이가 잘 커서 엄마는 좋다. 너도 좋은 엄마가 되었고 말이야. 고마워 이쁜 딸.     


ㅡ할머니, 여은이야. 엄마가 울면 할머니 마음이 아프다고 울지 말랬는데 나 왜 이렇게 눈물이 나. 내가 못됐나 봐. 할머니 사랑해. 고등학교 때 엄마랑 싸우고 할머니한테 갔잖아. 엄마 전화 왔을 때 할머니랑 짜고 나 할머니집에 없다고 말했잖아. 나 그때 엄청 좋았거든. 근데 할머니, 할머니가 몰래 엄마하고 통화하는 거 다 었어. 할머니가 내 편이 되어서 엄마 혼내고 있는 것 나 다 들었어. 그날 밤새도록 엄청 울고 반성 많이 했지. 할머니는 언제나 짱이었어. 내가 엄마한테 잘할게. 아빠 사업도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 내가 그래도 돈 좀 버는 디자이너잖아. 할머니 생각해서 엄마, 아빠한테 잘할게. 할머니 잘 가. 그리고 고마웠어, 우리 할머니.

ㅡ여은아, 할머니도 좋아. 여은이 생각만 해도 좋아. 엄마, 아빠한테 잘하겠다고 하니 할머니는 정말 좋다. 여은아, 네가 모르는 게 있다. 그날 내가 네 엄마랑 전화하는 것 네가 다 들었다고 했지. 사실은 너 들으라고 내가 애를 썼지. 티 안 나게 들키게 하는 것이 쉽지 않더라. 그러니까 여은아 네가 나한테 한 방 먹은 거야. 알어? 부모들은 다 그렇게 자식들 키우는 거야. 부모이고 자식이니까 싸우는 것이고, 부모이고 자식이니까 싸운 것이 훗날 살아가는 힘이 되는 거란다. 여은아, 나중에 아이 낳아서 길러보면 엄마가 했던 그대로  네가  자식들에게 하고 있는 것을 모게 될 거야. 그때서야 엄마 마음을 다 이해하는 거야. 여은아. 할머니가 네 옆에 오래오래 있고 싶었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고. 그래도 나 아파서 병원에 있을 때 네 남자 친구랑 왔었잖아. 내가 의식이 없었어도 니들이 하는 말은 다 듣고 있었어. 형원이라고 했지? 그 친구 맘에 들었는데 내가 환영도 못해줬네. 그 녀석 능글맞더라고. 너 간호사가 불러서 나갔을 때 글쎄 그 녀석이 '할머니, 저 여은이 진짜 사랑해요. 제가 여은이한테 가끔씩 혼나기도 하지만 잘할 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해도 여자들의 마음을 모르겠는 거예요. 할머니가 좀 가르쳐 주세요.' 이러더라니까. 여은아. 남자들이 하는 짓이 뻔히 들여다 보이잖아. 그래도 네가 모르는 척도 해주고, 속아 주기도 해. 그래야 가정이 행복한 거야.  남자들은 늙어도 하는 짓은 어린애야. 그러니까 늙어서까지 아들 하나 키운다고 생각하고 잘 받아 줘. 네 남자친구는 잘할 거 같더라. 행복하고 재미있게 잘 살아. 여은아 사랑해.

 

ㅡ여보, 내가 당신 맞으러 왔네.

이 양반이 언제 온 거야? 나 마중 나온 건가?

ㅡ아니, 영석이 아버지.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왔어? 내가 가서 찾아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마중 나와도 되는 거야?

남편이 손을 내밀고 있다. 내 손으로 곱게 곱게 지어 놓은 수의 마다하고 당신이 좋아하는 감색 양복을 입고 간 남편. 양복으로 갈아입힐 때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지금도 그 보드라운 웃음을 웃고 있다. 좋다. 역시 사람은 입성이 좋아야 한다.

ㅡ당신은 아이들이랑 더 놀다가 올 것이지, 왜 이렇게 급한 걸음을 한 거야?

ㅡ왜, 내가 와서 안 좋아?

ㅡ안 좋지 그럼. 그래도 당신 보니 좋기는 하네.


우리는 남편이 다니고 있는 철공소 옥상에 있는 단칸방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평소에 남편을 이쁘게 봐온 주인의 배려였다. 어머니에 이끌려 나간 다방에서 처음 만난 남편은 낯을 가리는지 자꾸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겨우 한 마디 했다.

ㅡ제가 잘할 거구먼요.

남편은 그 말대로 참 잘했다. 열심히 살았고, 아이들이 대학을 다닐 무렵에는 주인에게서 철공소를 물려받았다. 그때쯤에는 손에 돈도 좀 만질 수 있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환갑 전에 수의를 마련해 놓으면 오래 산다는 말을 믿고 안동까지 가서 제일 좋은 삼베를 떠다가 수의를 지어 놓았건만 손주가 의사가 되는 것도 못 보고 남편은 기어이 나를 등졌다. 기름으로 범벅진 옷만 입고 살았으니까 환한 양복을 입혀달라는 말과 함께.

ㅡ당신 떠나고 허퉁해서 나 많이 울었어. 아이들 몰래 숨어서 우는 것도 어렵더라고.

ㅡ숨어서 우는 거 내가 다 봤네. 안쓰러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지. 그래서 당신은 오래오래 있다가 오기를 바랐는데. 그래도 만나니까 좋기는 하네.

남편의 입성이 깨끗하고, 얼굴이 곱고 환해서 좋다.


ㅡ이보시게 친구, 잘 가시게. 나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곧 뒤따라 갈 거니 먼저 가서 화투판 깔아 놓고 기다리고 있어. 거기서는 치사하게 점 10원이 아니라, 점 100원짜리는 쳐보자고. 어이구,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네.

ㅡ치매 걸리면 자식들 고생시킨다고, 어떻게든 자다가 침대에서 죽어야 한다고 손가락 걸었던 친구가 아닌가. 이렇게 인사해 줘서 고마워. 우리 노인정에서 고스톱 꽤나 쳤었지. 달랑 10원짜리 치면서 돈 잃었다고 목소리 키우고 등 돌리고 서운해하면서도 손에 쥔 거 나눠 먹던 친구가 왔네. 친구도 아들 때문에 속 좀 썩었었는데, 그래도 돈 잘 버는 둘째가 지갑을 채워주잖아. 그 왜 질리도록 비가 내리던 장마 때. 그날 비 핑계 대고 노인정에서 자면서 자네와 둘이서 먹지도 못하는 술 먹으며 신세타령하던 거 생각나지? 남편들 흉 실컷 보다가 내가 며느리 자랑하니까 자네 얼굴빛이 살짝 어두워졌잖아. 그때 내가 미안했어. 어렵게 사는 자네 큰며느리 때문에 힘들었을 때였는데 내가 주책이었지. 그런 말 하는 게 아닌데 말이야. 그때 많이 서운했지? 알지. 내가 어찌 자네 마음을 몰랐겠어. 그때 미안하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 사과한다고 그 이야기 끄집어내면 또 한 번 자네 마음을 뒤집어 놓을 게 뻔하다고 생각했지. 지금에서야 내가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해. 이제는 친구도 마음 편히 살았으면 좋겠어. 늙는 것을 누가 막아. 여기저기 고장 나고 부서지는 걸 어떡하겠냐고. 여기로 올 때 제발 자네는 침대에서 자다가 오게나. 꼭.    


ㅡ자, 이제 우리도 어서 가세.

ㅡ여보, 잠깐만요. 어찌 우리 진수가 인사를 안 하는지 모르겠네.

ㅡ형제들, 자식들, 손주들에 친구까지 인사를 다 받았으면 됐지. 미국에 사는 진수는 못 올 수도 있는 거지. 너무 서운해하지 말자고.

ㅡ아냐, 여보, 진수는 꼭 올 거야. 내가 진수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 아이는 나의 전부였어.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진수는 장손이다. 처음으로 태어난 손자가 아닌가. 세상의 어떤 보물을 주어도 진수의 웃음만은 못했다. 아장아장 걸을 때면 내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고, 배시시 웃을 때면 세상 즐거움을 다 몰려왔다. 하버드인지 할아버지인지 미국 대학을 다닐 때 있는 돈 다 끌어모아 진수에게 보내면서도 세상 다 가진 듯이 좋았던 것은 그 녀석이 내 손자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며 인사하고 간 이후에는 못 보았지만, 언제나 눈가에 맺혀 있는 아이였다. 언젠가 친구가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키는 거’라며 잊어버리라고 했을 때, 서운해서 열흘이나 노인정에 나가지 않기도 했었다. 그런 진수가 왜 오지 않는 걸까. 정말로 그런 걸까. 미국이 좋아서 이 할미는 다 잊어버린 걸까.


자꾸만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머릿속에 하얀 것들이 채워진다. 그나마 또렷이 보이던 신작로마저 흐릿하게 보인다. 그나마 들리던 소리마저 가물가물해진다. 가야 할 때가 된 모양이다. 마중 나온 남편의 손을 잡고 가야 하는가 보다.


ㅡ할머니, 진수가 왔어요. 할머니, 진수가 진수 진ㅅ 지.......


진수 목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다. 어둠이 둘둘 몸을 말아온다. 남편의 손을 잡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내 옆에 남편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 손주들, 친구의 얼굴이 흐릿해진다. 멀어져 가는 그들에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어둠이, 두꺼운 어둠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신작로를 완전히 덮는다. 나는 어둠 속으로 걸어간다. 발걸음에 힘이 있다.  


이래서 천상병 시인이 '아름다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이렇게 노래했구나.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래, 내 소풍 아름다웠지.  

  

ㅡ여보, 이 신작로 끝, 거기에도 빵집이랑 옷가게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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