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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Feb 24. 2024

3화 고담古談, 또는 그녀

제5회 신라미술대전 대상 수상작(김형동 화백)






그는 그녀의 전화를 받은 후 한 달을 넘게 칩거하고 있었다. 붓을 드는 것은 고사하고 침대에서만 뒹굴고 있었다. 커튼도 걷지 않고 묽은 어둠 속에 누워 천장만 바라봤다. 해가 뜨거나 지거나 그에게는 밤이었다. 물감 냄새와 그녀가 어우러진 캄캄한 밤이 이어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무너지고 있었다.


어느 날 그녀가 떠났다. 화구를 모두 놓아둔 채 아무런 말도 없이 몸만 떠나갔다. 그는 그녀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없었으므로 그녀가 떠나간 것은 그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녀가 던져놓고 간 붓끝에서 물감은 딱딱하게 굳어갔고, 그녀의 캔버스에는 먼지가 두껍게 앉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화구들을 등지고 그림을 그렸다. 일출봉의 봄을 그렸고, 머릿속에 담고 있던 마을을 그렸다. 해가 지는 산을 그렸고, 눈이 쌓인 자작나무 숲을 그렸다. 평안한 마음까지는 아니었지만, 그의 붓끝은 살아 있었다.


"사랑했었는데....."

몇 달인가 낮과 밤이 바뀌었, 그는 아무렇지  않게  캔버스 앞에  앉아 신라미술대전에 출품할 작품에 몰입하고 있었다. 에밀레종의 이미지를 지금의 시대에 구현하고 싶었다. 머릿속은 어수선하고 마음은 갈래갈래 흩어졌다. 그때, 그녀가 전화기 너머에서 울고 있었다.


ㅡ 사랑했었다고? 나를?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그냥 불쑥 터져 나오는 실소失笑 끝에 어이없다는 생각이 잠깐 매달렸다 사라졌다.


바람이 창을 흔드는 날이 이어지고 있었으나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캔버스 앞에 앉아 있었다. 붓을 들었고, 테레핀 냄새에 싸여 잠이 들었다.  


새벽녘 화실은 지하 동굴처럼 고요했다. 세상이 정지된 것 같은 시간이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붓끝에서 힘이 빠져나간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그녀가 옆에 서 있었다.


어둠이 드문드문 남아 있는 거리를 달렸다. 마음이 흩어지면 끝이다. 그림은 언제나 안정된 마음으로 그려야 한다. 울부짖고, 가슴을 쥐어뜯어도 마음을 다스리기만 하면 그림은 그려진다. 숨이 멎을 만큼 언덕을 뛰어 올라갔다. 텅 빈 공원에 그녀가 서 있었다. 그는 주저앉았다.


그녀의 울음이 전화기를 타고 흘러온 때부터 그는 시나브로 무너지고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그는 갑자기 떠나버린 그녀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지냈었다. 그녀가 떠나기 전까지는 그녀와 시시덕거리며 밥을 먹었고, 그녀의 옆에서 그림에 몰입하였었고, 어느 때든 각자의 간이침대에 쓰러져 잤다. 그녀가 발가벗고 있었다고 해도 그는 무채색의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냥 그들은 자기의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


전화선을 타고 넘어온 '사랑했었는데'라는 말이 비수처럼 박혀버렸을까. 그게 뭐라고 그는 캔버스 앞에서 굳어지고 있었다.


보름 정도를 흔들리고 있을 그때, 소설을 쓰고 있는 친구가 찾아왔다.

"뭐야? 그림이 왜 이래?"

캔버스를 이리저리 짚어보던 친구가 얼굴을 찌푸렸다.

"붓놀림이 많이 흔들렸잖아. 나이프를 어떻게 사용한 거야? 채도는 왜 이렇게 낮은 거냐고"

친구가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무슨 일이야. 무엇 때문에 그림이 이 모양이 된 거야?"

"나도 몰라. 그림을 그릴 수가 없어."

그는 그녀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너는 비혼주의자니까 여자 때문은 아닐 거고. 그럼, 너나 나나 언제든 슬럼프를 피할 수는 없지. 어디든 가서 며칠 좀 돌아다니다 와."

친구의 말은 그냥 하나의 어떤 소리로 지나가고 있었다.


한 달 만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걸고 또 걸었다. 전화를 걸다가 잠이 들었고, 깨어나면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느 시골집이었다. 어둠의 농도가 짙은 것으로 보아 밤이었다.  그는 방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온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차가운 방바닥에 꼼짝도 않고 엎드려 있었다. 고약한 냄새가 났다. 방바닥에는 곰팡이가 번져 있었다. 곰팡이가 만들어낸 무늬는 방바닥을 넘어 그의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곰팡이로 변해 있었다.  그때 그녀가 걸어왔다. 황금색 드레스를 입고, 레이스가 길게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는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녀를 껴안으려고 할 때, 그녀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녀는 천마天馬가 되어 있었다. 입에서는 불을 뿜었고 갈기는 날카로웠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주변을 점령했던 곰팡이도 하늘로 날아올랐다.

는 팔짝팔짝 뛰다가 잠에서 깼다. 꿈이었다.


갑자기 배가 고팠다. 화실을 덮고 있는 어둠이 느껴졌다. 불을 켜고 홀로 앉아 라면을 끓여 먹었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흘 밤을 보내고 나서 붓을 들었다. 정신이 흐릿했고, 몸은 볼품없이 망가져 있었다. 이외수의 <들개>가 생각났다. 자신을 던져 그림을 그렸던 젊은 화가. 그는 그 젊은 화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그런 자신이 웃긴다고 생각했다.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그는 중얼거렸다.  


밤바다 그는 절망에 빠져 캔버스 앞에 앉아 있었다. 초점이 흐릿해졌으나, 그녀는 언제나 그림 속에 앉아 있었다. 그런 그녀를 그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청맹과니의 눈으로 을 세웠다. 누렇게 피어 있던 곰팡이는 사방으로 펴져 나갔다. 날아오르던 천마의 온몸을 누렇게 물들였다.


밤은 짙은 어둠을 토해냈고, 낮은 어김없이 하늘을 밝혔다. 낮은 밤으로 바뀌었고, 밤은 낮을 낳았다. 그렇게 그는 가냘픈 숨을 쉬었다. 그 들숨을 따라 그의 붓은 일어섰고, 그 날숨을 따라 그의 캔버스는 바르르 떨었다.

그는 밤을 따라 그녀를 찾아다녔고, 낮이 빛을 뿌리는 동안 그녀를 붙잡으려 했다. 그는 늘 힘을 잃었다.


그렇게 밤이 되었고, 낮이 이어졌다. 아픔이 그를 향해 몰아쳤다. 그는 몇 번을 쓰러졌고, 또다시 무너졌다. 하늘이 희미해져 갈 때, 그는 가까스로 그녀를 움켜쥐었다. 놓쳐서는 안 되었다. 그녀를 철망 안에 가두었다. 그는 손을 뻗어 천마에게 향했으나 닿지 않았다. 그의 손은 번번이 철망 앞에서 힘을 잃었다. 그녀는 철망 안에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녀는 퍽 자유롭게 하늘을 날았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실소失笑하지 않았다.


철망을 그려 넣었을 때 날아오르다니!


신라미술대전 대상을 받았다. 그녀는 없었다. 그녀가 그린 그림으로 혼자서 그는 상을 받았다. 부끄러웠다.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는 고담 古談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옛날이야기라고 말하고 싶었다. 처음부터 그녀는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니 자신도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받아들일 수 없는 변명이었다.


말라버린 그녀의 붓만 화실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고, 그는 그 옆에 그냥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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