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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Mar 02. 2024

4화 나는 자꾸만 그를 떠났다.

     사진출처 울주나인피크 홈페이지.    




영축산에서 신불산으로 이어지는 억새밭에서 맞닥뜨린 바람은 기어이 눈물을 흘리게 했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다고 나는 신불샘 근처 데크에 앉아 실컷 울었다. 경직되어 오는 종아리와 허벅지에서 쏟아지는 아픔 때문이기도 했지만, 영남 알프스 산등성이를 타고 이어지는 그 눅진눅진한 외로움을 견뎌내지 못한 탓이다.    

  


그가 보고 싶었다. 미치도록.      



동갑내기들로 구성된 마라톤 크루에서 그를 만났다. 그때 우리는 남산을 달리고 있었다. 남측 순환로의 언덕을 숏피치로 치고 오를 때 그를 보았다. 검은색 싱글렛과 쇼츠를 입고도 검은 모자까지 눌러쓴 그는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한동안 그는 내 옆에서 나란히 달렸다. 거친 숨소리만 어우러졌을 뿐이었으나, 나는 그에게 기울어지는 마음을 추스르기에 바빴다. 오랫동안 마음으로만 지켜봤던 그가 내 옆에서 달리고 있다. 그의 숨소리가 내 몸에 닿았다.     


ㅡ 왜 이러는 거야. 이 남자가 뭐라고.

ㅡ 나도 몰라. 괜히 마음이 끌리잖아.

ㅡ 남자에 관심이 없다고 했잖아.

ㅡ 그러니까.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니까.      


기진맥진하여 달리기를 멈추었으나, 그를 향한 내 마음은 멈추지 않았다. 달리기로 덮어 놓았던 연애세포가 한꺼번에 솟아났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전화를 걸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보내왔으나 나는 가슴이 뛰었다.      



그렇게도 달리고 싶어?”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의 창가에서 그가 물었다.

“지금 진지하게 물어보는 거지? 해남에서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달리는 거야. 같이 달려볼래?”

내가 품고 있는 것을 그대로 말했다.

“그쯤이면 중독 아닌가?”

“남들은 중독이라고 하는데 나는 늘 도전하고 싶거든.”

그의 얼굴에 잠깐 그늘이 이는 것을 보았다.

“나는 제대로 된 남편과 아빠가 되는 거야. 평일에는 열심히 일하고, 주말엔 즐겁게 사는.”

“좋은 생각이다. 나도 그랬었지. 그런데…….”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성실하고 얌전했으며, 운동도 열심히 했다. 나를 심심치 않게 만드는 유머 감각도 뛰어났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행복 냄새가 풍기었다.     

 

ㅡ 내가 사람을 잘 골랐어. 잘했어, 아가씨.     


우리는 불같은 사랑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한강을 달렸고, 땀을 흘리며 맥주를 마셨다. 손을 잡고 북한산을 올랐고, 그가 쳐 놓은 텐트에서, 그가 만들어주는 요리를 맛나게 먹었다. 평창의 육백 마지기에서 쏟아지는 별빛을 온몸으로 맞았다. 동해의 모래밭을 달렸다. 그렇게 우리는 깊은 사랑을 나누었다.     

 

“결혼하자.”

밤새 치렁대는 파도 소리를 넘어 그의 목소리는 담백하게 들렸다. 가슴이 뛰었다. 100 미터를 전력 질주한 느낌이었다.      


ㅡ 이것이 사랑이로구나. 그런데 어쩌면 좋아.      

서울 둘레길 157km, 운탄고도 173km, 영남알프스 나인 피크 121km 트레일런, 도쿄 마라톤, 베를린 마라톤, 한반도 횡단 마라톤 330km 그리고 트랙 24시간주 한국 대표 선발전. 이것들을 어떻게 해야 하냐고.

나는 달리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서울 둘레길 트레일런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헤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포기할 수 없었고, 그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나 나나 편안한 마음으로 등을 돌렸다. 그래서일까. 서울 둘레길 157km는 여성 달리기 4인방들과 하하 호호 가볍게 달렸다. 피니쉬 라인이 가까워지면서 그가 생각났다. 달리기를 멈출 때마다 땀을 닦아주던 그가.      


집에 돌아와서 울었다. 땀에 젖은 운동복을 내팽개치고 방바닥에 엎드려 울었다. 가슴이 쓰라렸다. 밤은 참으로 길었다.  아침이 오기도 전에 그에게 전화했다.    


그가 맛있는 음식들을 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자주 해줘서 혀끝에 항상 감겨 있는 뵈프 브르기뇽의 부드러움이 목젖을 타고 흘렀다. 행복했다.

“결혼하자. 그래서 우리 행복하게 살자.”

"달리기에서 나에게로 와 줘서 고마워. 사랑해."

나는 그 앞에서 러닝화를 벗고 싶었다. 이제는 달리기보다는 그의 품에서 살고 싶었다. 그가 환하게 웃었다. 우리는 나란히 해안선을 달렸다. 파도 소리가 숨이 가쁜 우리를 끌어당겼다. 바람이 우리의 마음을 이어 놓았다. 파란 하늘 아래에서 우리는 서로의 사랑을 들여다보았다.     



고민했다. 그와 나누는 행복한 시간 앞에서 열흘을 비틀거렸다. 그리고는 울주나인피크 앞에서 나도 모르게 러닝화를 신고 말았다. 다시는 그에게 다가설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ㅡ 나는 달리기를 멈출 수 없어. 너를 마음에 담고 살아갈게. 미안해.      


나는 내가 참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품에 갇혀 있을 수는 없었다. 연애의 달콤함에만 빠져 살고 싶었다.

그는 결혼을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비혼이라고 말했다. 돌아서는 그의 등이 쓸쓸하였다.


    

신불샘 데크를 벗어나 신불산을 뛰어오르며 울었다. 간월재로 달려가며 또 울었다. 어둠이 눈물로 범벅진 나를 가려 주었다. 가슴이 쓰라렸다.      


ㅡ 나는 그를 사랑한 것이었을까.      


간월재 임도를 벗어나면 피니쉬라인이다. 서른여덟 시간. 영남알프스 아홉 개 봉우리를 넘어 나는 무엇을 담았는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가 움켜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에게 등을 돌리고 떠나온 나의 걸음은 생채기 없이 이어질 수 있을까.


그가 보고 싶었다.      


숨이 막혀 온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산등성이마다 내가 흘렸던 것은 땀방울이 아니라 그를 향한 그리움이었다. 그를 떠나지 못하는 나의 찢긴 마음이었다. 아니라고 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랑이었다.      


외로운 시간이었다. 힘든 나인 피크(9 peaks) 트레일이었다. 짙은 어둠을 파헤치는 헤드 랜턴 불빛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상실감이 나를 짓이겼다. 동트는 새벽에는 뜨거운 울음으로 달리고 있는 나를 보았다. 그의 품을 버리고 나는 홀로 산등성이에 서있었다.  나의 마라톤은, 나의 트레일런은 무채색이었고, 철저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는 나를 맥없이 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만 그를 떠났다.

   

 

피니쉬 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홀로 달려온 서른여덟 시간의 끝에그가 환한 웃음으로  꽃다발을 흔들고 있었다. 그가 서른여덟 시간 동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버리고 온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을 짓누르고 있는 어둠이 한순간에 물러났다. 그 자리에 그가 서 있었다. 내가 돌아서도 그는 나에게 다가왔다. 상처를 받았을 그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그는 언제나 내 곁에 서 있었다. 사랑이었다.      


ㅡ미안해. 다시는 너를 떠나지 않을게. 사랑해. 그리고 고마워.     


부끄럽고 뻔뻔한 얼굴로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의 품에 안겼다. 행복했다.

그러나 내가 안은 것은 그가 아니라, 그를 향한 내 마음이었다. 짙어가는 어둠이었다. 내 안으로 흐르는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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