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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Feb 17. 2024

2화 비

2013년 겨울, 비 오는 타이베이 시먼딩에서 만난 그녀





나는 어둠이 내려오는 횡단보도에 서 있었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지만 말없이 서 있었다. 신호가 네 번이나 바뀌는 것도 보았다. 나는 잿빛 우산을 들고 처럼 서 있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빗울에 그의 얼굴이 슬쩍 묻어났다.


그를 만난 건 도서관이었다. 2층 서고에 올라가 동양철학 서가에 기대어 어쩌다 빼든 명리학 서적을 건성건성 넘기고 있었다. 천간天干이니 지지地支같은 용어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눈길을 움켜쥐기 시작할 즈음 낮은 탄성이 들렸던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렸을 때 그가 서 있었다.


"저, 우산 좀 같이 쓸 수 있겠습니까?

도서관을 나서는데 그가 불쑥 말했다.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말하고 있는 티가 확 났다.

곱게 빗어 넘긴 긴 머리에 불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오른손에 커다란 우산을 들고 서있는 그의 얼굴 어딘지 슬픈 빛이 감돌고 있었다. 슬픈 빛 때문이었을까. 제어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까.  나는 거짓말처럼 그에게 빨려 들어갔다.  나의 작은 우산 속에서 우리는 온몸으로 비를 맞았고, 사랑을 나누었다. 비는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행복했다.


"행복할 수 있을까?"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렇듯이 무거웠다.

"우리 1년도 더 지났어. 아기도 낳았을 만큼의 시간을 같이 보냈어. 그동안 행복했고, 행복할 거야."


눈이 시리도록 하늘이 파랗던 날, 그가 몸을 감추었다. 하루를 울었다. 울고 또 울고 다시 울었다. 그리고 다음날 또 울다가 그의 자취방으로 갔다. 문이 닫혀 있었으나, 그의 체취가 오롯이 남아 있었다. 그의 체취에 섞여 있는 나의 숨결도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없었다.



이틀 동안 문을 닫고 누워 있었다. 약 먹을 힘조차 빠져버렸다. 숨이 가빴다. 나는 누운 채로 그녀를 생각했다. 행복의 실체를 그려보았다. 그러나 번번이 허공을 내저을 뿐이었다. 나는 행복했었고, 행복하고,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떠나는 게 맞다. 떠나야 한다. 내 안에 그녀를 품고 작은 포구가 있는 마을에 틀어박혔다.  핼쑥해진 밤이면 검게 타버린 바닷바람을 붙들고 앉아있었다.


온몸을 파고드는 병마는 견딜 수 있었다. 삶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버텨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덜어내야 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놓아주어야 한다는 마음을 먹었을 그때, 그 애잔한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렸다. 아픔이었다.



인사이동을 신청했다. 부장부터 동료직원까지 모두 말렸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떠나야 했다. 버려지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들의 도시 떠나는 걸음을 그냥 바라보고만 있었다. 우리는 비를 맞으며 만났고, 작은 우산 속에서 마음을 포갰었다. 사랑했었고, 그만큼 행복했다.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에게서 떠나는 날도 비가 내렸다. 울고 싶었으나 남이 있는 눈물이 없었다. 그리고 열흘 정도 마음이 아팠다.


낯선 읍내에는 날마다 해가 솟았다. 금빛을 뿌리면서도 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날마다 그 아무렇지도 않은 햇볕을 받으며 걸어서 출근했다. 그리고 기울어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왔다. 걸음마다 찢을 듯한 아픔이 쌓였다. 그를 지우면서 울었다. 사랑했었다고 외치며 속으로 울었다.  비가 내리지만 않는다면 어떻게든 살 수는 있을 거라고 나 혼자 생각했다. 비가 내리지 않기를.



견딜 수가 없었다. 혼자 앉아 있는 바다는 날마다 그녀를 그려 놓았다. 그녀는 피가 고이고 있는 가슴속에서 오롯이 살아 있었다. 웃고 있었고, 울고 있었다.

느닷없이 비가 쏟아지던 날, 바닷바람보다 더 검게 타버린 마음으로 버스를 탔다. 다시 돌아온 날, 그녀는 없었다. 우리들의 도시는 텅 비어있었다.

자취방의 문을 열었다. 그녀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졌다. 며칠을 방 안에 앉아 있었다. 가슴에서 통증이 일었다. 아무것도 없는 도시를 돌아다녔다. 곳곳에 우리가 보냈던 시간들이 흐트러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도서관에 갔다. 퇴근 시간이면 그녀가 웃으며 나오던 건물 앞에서 날마다 그녀를 기다렸다. 곱게 빗어 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던 그녀는 없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만 어른거릴 뿐, 그녀는 밤이 되어도 보이지 않았다.

텅 빈 도시에서 서성거리고만 있기에는 손에 쥔 시간이 너무 없었다. 가슴이 저려올 즈음, 그 작은 읍을 알았다. 발작을 하는 가슴을 부여잡고 작은 읍으로 숨어버린 그녀에게로 갔다. 그곳은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녀는 노을빛에 젖어 타박타박 걷고 있었다.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그녀의 보폭만큼으로 따라 걸었다. 그녀와의 사이에 어둠이 채워지고 있었다. 캄캄한 밤에 그녀의 집 앞에 앉아 있었다. 울지는 않았다.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리고 힘없이 웃었다. 비가 내리지 않아서 좋았다.



신호등이 다시 바뀌면 우산을 접고 횡단보도를 건너야겠다. 비를 맞으며 차오르는 어둠을 따라 걸어야겠다. 시가지의 끝까지 걸어 그를 우산 밖으로  밀어내야겠다. 돌멩이라도 한 번 던져볼까. 그의 가슴 한가운데에 피멍 하나쯤 새겨 놓을까. 내 가슴을 다 열어젖히고 어둠을 몰아오는 빗줄기를 가득 채워 놓을까. 그러면 홀로  살아지기는 할까. 홀로 걸을 수는 있을까.


작은 읍내를 적시는 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진다. 햇볕이 그랬던 것처럼. 지나가는 사람들, 비에 젖고 있는 보도블록,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들, 그 뒤로 엉성하게 늘어선 잿빛 건물들 모두 아무렇지 않게 비를 맞고 있다. 작은 읍이었지만 홀로 있는 나에게는 너무나 넓었다.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도회지는 모두 아무렇지 않은데 나만 홀로 아무러했다. 갈쌍갈쌍 눈물이 났다. 나는 빗물이라고 우겨댔다.


신호가 바뀌었어도 길을 건너지 못했다. 건너편에 그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초췌한 모습이었다.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그는 어딘지 처음 만났던 때의 그 슬픈 눈빛으로 서 있었다. 온몸이 굳어버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느다랗게 느꼈다. 그것은 내 마음속 깊은 곳을 베고 찌르는 것이었다.

그가 쓰러졌다. 입에서 피를 흘린 듯했다. 그는 바둥거리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쏟아지는 빗줄기를 그대로 받아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쏟아지는 피가 빗물을 따라 흘렀다.



자꾸 피가 넘어왔다. 그녀에게서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가지를 벗어나 비가 내리는 어둠을 걸었다. 나무들이 늘어서 있는 둑길에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잿빛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꼿꼿이 서 있어야 한다. 그녀 앞에서 쓰러지지 않아야 한다. 그녀가 우산을 들고 다가왔다.


ㅡ우산 속으로 들어와. 거기 서 있지 말고.


그러나 빗줄기에 눌린 몸은 시나브로 무너졌다. 바둥거리지는 말자. 그냥 눈을 감아야 한다. 어둠으로 내리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길건너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를 보았다고 생각하다니! 비가 내리는 탓이라고 받아들였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길을 건넜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우산을 쓰고 빗줄기를 헤치고 길을 건넜다. 그가 쓰러져 있던 곳에는 며칠째 내리고 있는 비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리고 있었다. 그때 내 옆에 그가 서 있다. 어딘지 슬픈 눈빛으로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내 옆에서, 당장 쓰러질 것 같은 내 옆에서 그가 먼저 쓰러졌다.


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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