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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Feb 10. 2024

1화 달빛 자르기

            

여름날 밤의 판은 이미 아내의 생일상을 흐드러지게 차려 놓고 있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내리는 달빛은 투명하고 맑은 커튼을 드리워 우리를 감싸 주고 있고, 풀벌레들은 저마다의 목소리로 축하의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다.     


어차피 시작한 것이니만큼 닭살이 돋더라도 영화배우와 같은 목소리 분위기를 잡아 ‘사랑한다’라는 말과 함께 뜨거운 입맞춤을 하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한다. 이제 막 마라톤에 흠뻑 빠져버린 초보 마라토너인 나는, 옆에서 달리고 있는 아내를 힐끗 바라본다. 잔뜩 굳어 있는 표정의 아내를 향해 속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조금 후에 보라지. 당신이 얼마나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가를! 영원히 잊지 못할 생일 선물을 기다려 보라구.’          



“어서 오세용. 오늘도 당신 힘들었지? 당신 좋아하는 우럭 매운탕 끓여 놨어. 어서 와서 앉아.”


퇴근하여 문을 열어주는 아내의 얼굴이 환하다. 아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내가 왜 모르겠는가.


ㅡ 빨리 선물 사 온 거 내놔 봐. 한 달 전부터 목걸이 사달라고 그렇게 암시했는데도 못 알아들었다고? 설마  그랬겠어. 아니지? 여보 그렇지?


틀림없이 이러고 있을 것이다. 이럴 때는 아내의 감정을 끌어올려야 한다. 에너지를 비축할 대로 비축한 마그마가 세상을 바꿔놓을 정도로 화염을 뿜어내는 것이 아닌가. 지금 이 무너질 만큼 서운해야 달빛 아래에서 쏘아대는 축포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않겠는가.


ㅡ 당신이 여우라면 나는 그런 여우와 같이 사는 늑대야. 흐흐흐 속 좀 타고 있어 봐.

ㅡ 옴맘마! 지금 이 순간 당신 얼마나 귀여운지 알아? 마누라 생일인데도 빈손인 것처럼 보여     서 내 속을 타게 하려는 그 얄팍한 수작. 이거 왜 이래? 어설프기 짝이 없지만 내가 속아  넘어가는 것처럼 해줄게.     


“식사하세요.”

아내가 부르는 소리가 마치 빨리 선물 보따리를 내놓으라는 목소리로 들렸다. 그러나 나는 태연하게 밥을 먹었다. 아내가 끓여 놓은 우럭 매운탕은 정말 예술이었다.


“밥도 먹었고, 중인리 들판에서 달리기나 한판 할까? 달빛도 좋고 기가 막히겠네. 달빛 자르기 어때?”


ㅡ 뭐야  이 인간. 선물 증정식은 언제 할 거야. 그러고 보니 케이크도 안 사 왔잖아? 설마 오늘이 내 생일인 걸 까먹었다는 거야? 아닌데? 하는 짓을 보면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 같은데. 좋아. 나도 은근슬쩍 속는 척해줄게.


“달빛 자르기? 좋지. 오늘 달빛이 좋아서 아주 낭만적이겠는데?”


어쭈! 이 여자 봐라. 너무 태연한데. 어제 사다 벨트색에 넣어 놓은 목걸이를 봐버린 거 아냐?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나올 리가 없는데. 에이, 설마 선물을 잘 사용하지도 않는 벨트색에 넣어 두었다고 생각이나 했겠어.


아내가 고분고분하게 나오는 것이 의문스럽기는 했지만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모자도 쓰고, 벨트색을 열어 목걸이를 확인하고 허리에 찼다.


“운동하러 나가지.”

“좋아 덥기는 하지만 이열치열이라고 신바람 나게 달려보자고.”

아내는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우리는 늘 달리던 중인리 들판으로 나가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의도적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내도 묵묵히 달리고 있을 뿐이다.


ㅡ 이 인간. 지 마누라 생일을 잊은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마누라 생일날에 달리기가 뭐냐고? 근사한 카페에 가서 케이크도 자르고 내가 원했던 목걸이도 걸어 주지 않고.

ㅡ 어때? 속이 타서 죽겠지. 마누라 생일날 달리기나 하고 있다고 지금 불만이 가득하잖아. 그러나 마누라야 조금만 기다려 봐. 틀림없이 좋아 죽을걸.        

  


내가 풀코스를 달리는 것을 보고 자기도 마라톤을 하겠다고 처음으로 운동화를 신고 나섰던 때는 초등학교 운동장 한 바퀴도 못 돌고 주저앉아 버렸던 아내. 그러나 그 끈질긴 근성으로 일 년 만에 금년 봄 제5회 서울마라톤대회에서 풀코스를 완주하기까지 우리는 지겹도록 이 중인리 들판을 달리며 서로에게 힘을 실어 주었고, 달리기의 고통 속에서 우리는 삶의 아픔들을 이겨낼 수가 있었다. 마라톤은 우리 삶의 활력이었고, 그만큼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마라톤은 분명히 우리 부부의 사이를 꿀과 같이 달콤하게 이어 주었다.  돈이 아까워서 두부 한 모 사는 것도 망설이고 망설이는 짠돌이가 마라톤에 빠지더니 그 비싼 마라톤화는 볼 것도 없이 척척 질렀다. 덕분에 나도 최고 제품을 신을 수 있어서 좋았다. 달빛이 쏟아지는 날이면 중인리 들판은 우리의 놀이터였다. 달빛 자르기라는 이름을 붙여가며 밤이 깊도록 뛰어놀았었다.


     

이제 조금만 더 달리면 오늘 벌일 아내의 환상적인 생일파티장에 도착하게 된다. 들판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교차로에 다다를 것이다.     


교차로 부근 비닐하우스 속에 미리 준비해 둔 아주 소중한 상자, 오늘 아내를 환상의 세계로 이끌어 줄 고귀하고도 아름다운 나의 음모의 결정체. 질펀하게 쏟아지는 달빛의 환호를 받으며 46개의 촛불을 밝히리라. 그리고 달빛을 가득 머금은 목소리로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불러야지.     


ㅡ젖은 손이 애처로워 살며시 잡아본 순간~


아내는 흐드러지게 쏟아지는 달빛에 촉촉이 젖어 감동의 눈물을 흘리리라. 그저 울고만 있을 뿐, 한마디 말도 못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영화의 주인공이나 된 것처럼 행복해하겠지.

그때 미리 써 둔 편지를 읽어 주는 거야.     


…… 마라톤! 거기에는 사랑이 있고 행복이 있소. 또한, 우리가 달리는 발자국마다 아름다운 언어가 있고, 삶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오. 오늘 우리의 머리 위로 덮이는 달빛을 따라 당신의 사랑이 있소. 나는 당신의 마음에 담겨 살아가려고 하오. 우리의 마음을 모아 달려 봅시다. 지나온 많은 아픔과 애환을 모두 다 털고 오직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만 풀코스를 넘어서도 끝없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주로(走路)를 말이오. ……'    

 

그리고 케이크를 자르는 거야. 아내는 정말 감동을 하여 한마디 하겠지.


ㅡ 달빛 아래서 자르는 생일 케이크,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야. 달빛 자르기……. 여보! 사랑해.


그때 말없이 뜨거운 키스를……. 흐흐흐 어떤가? 내가 준비한 생일 파티가.


이윽고 교차로에 다다랐다.

“사모님! 잠깐만 멈추시지요.”

“왜? 이제 막 발끝에서 즐거움이 쏟아지려고 하는데.”

“오늘이 당신 생일이잖아. 그래서 내가 생일상을 차려두었거든. 조금만 기다려. 내 금방 가져올게.”

궁금해하는 아내를 뒤로하고 비닐하우스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케이크와 편지를 숨겨 둔 곳으로 가서 덮어두었던 파란 비닐을 걷어 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거기에는 내가 써 둔 편지 봉투만 뒹굴고 있을 뿐, 내 마음과 내 사랑, 그리고 내 정열을 모두 담아 곱게 모셔 두었던 케이크 상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게 아닌가. 나는 편지 봉투를 집어 들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케이크 잘 먹겠소. 생일잔치라는 것이 어디 케이크에 촛불을 꽂아야만 행복이겠소. 부부가 같이 달리는 것만으로도 당신들은 이미 행복한 사람들이 아니겠소? 생일 축하한다고 부인에게 전해 주시오..

   

비닐하우스를 나서는데  일그러진 아내의 얼굴만 들판에 가득 차 있었다.  흐드러지게 쏟아지는 달빛을 받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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