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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Jun 08. 2024

27화 그렇게 친구는 갔다. 눈물도 없이



마음, 참 허퉁하던 나이었고 아프게 비가 내리는



비가 내린다. 토요일 아침을 타고 내리고 있으나, 이미 목요일 새벽부터 퍼붓고 있었다, 비는. 그리고 그는 떠나버렸다. 희곡을 써 무대 위에 세상을 펼쳐놓던 친구는 무대의 막이 닫힌 줄도 모르리라. 이렇게 친구를 보내는 나 또한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혹시 꿈은 아닌지 혼란스러울 뿐이다.



밤이 새벽을 장만하고 있을 무렵, 그는 비틀거렸고, 넘어졌고, 일어나 다시 넘어졌다.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했다. 아직 그의 이야기가 남아 있기에. 무대 위에서 소리쳐 말해야 할 그의 가슴이 많이 남았기에, 그러나, 아무렇지 않게 새벽은 자신의 걸음을 쿵쾅쿵쾅 걸었다. 새벽이었으나 어둠뿐이었다.


76학번 국문과 입학생은 모두 30명. 남학생 22명, 여학생 8명이었다. 진달래가 필 즈음 화전花煎놀이를 명목으로 완행버스를 타고 아유회를 갔다. 산기슭 어름에서 우리는 기어이 화전을 부쳤고, 지나가시는 마을 어른들을 모셔다가 막걸리를 한 잔씩 대접했다. 어른들이 부르신 '러간 노래'에 답하여 친구는 팝송을 불렀고, 어르신들은 뭐하는 짓이냐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L이 부른 팝송이 뭐였었지?"

"You mean evreything to me 였지."

"그래 맞다. 그때 어르신들이 그게 무슨 노래냐며 역정을 내셨던 기억이 나네."

"그래서 내가  '애수의 소야곡'이랑 '꿈꾸는 백마강'을 연속으로 불러서 어르신들의 마음을 돌렸잖아."


우리는 50년을 거슬러가며 시시덕거렸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허전하였고, 그 지랄같은 아픔을 밀어내보려고 지나간 시절들을 자꾸 불러냈다. 대낮인데도 탁자에 술병을 늘어세웠다. 술병 하나에 풋풋했던 1학년 시절이 담겼고, 술병 하나에 국문과의 치프레이즈 "좌우지간 놀자"가 살아났다.


국문과는 대대로 공부하는 학과가 아니었다. 어디서 듣고 본 것은 있어서 교과서는 어디에 던져버리고, '문학사상'이나 '사상계' 또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들고 다녔다. 수업은 부지기수로 빠졌고, 교수님들은 수업일수만 채우면 문제삼지 않았다. 그때 친구는 조태일의 '국토'를 들고 다녔다.


몇몇이서 막걸리 두어 병 내려놓고 잔디밭에 앉아 어둠을 바라보다가 누군가 신경림 시인의 '갈대'를 읊었다.


"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우리는 삶은 고뇌라며 막걸리잔을 들었다. 그때 친구는 조용히 싯구절을 읊었다. 조태일의 "국토"였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조태일을 입에 올리는 것도, 하물며 그의 책을 들고 다니는 것도 힘든 세상이었는데, 우리는 그날 밤 그런 시를 써야 한다고 의기투합했었다.


대학 연극반은 언제나 힘이 넘쳤다. 우리는 희곡을 썼다. 혼자서 썼고, 같이 힘을 모아 썼다. 그러나 한 번도 우리의 작품은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함량미달이었다.

당시 전국대학연극축전이 있었는데, 각 도별 예선을 거쳐 전국대회에 참가하게 되어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창작 희곡으로 참가하기를 원했지만, 극회 회원들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서울에서 열리는 본선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좋은 희곡을 선택해야 한다는 논리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오태석의 "태"를 가지고 본선에 진출했고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당당하게 공연했다. 그해는 오로지 "태"로 극회 1년을 보냈다. 그러나 우리의 희곡은 빛을 보지 못하고 스러졌다.


대학을 졸업하는 순간, 우리의 젊음도, 그에 따른 방황도 모두 끝이 났다.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기르고, 부모님을 보살피고, 집을 사기 위한 몸부림 같은 것으로 그나마 남은 젊음은 속절없이 닳아가고 있었다. 문학도 흔적없이 사라졌다. 어쩌면 멀어져가는 문학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날 친구는 느닷없이 술병을 들고 나타났다. 국립극장 희곡 공모전에 당선되었다고 했다. 40이 넘은 우리는 마치 내일처럼 기뻐했다. 그러나 그것이 친구의 변곡점이었다. 학교를 그만두었고, 대학원에서 희곡을 공부했다. 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으나 그는 두문불출하며 작품을 썼다. 연극평전을 썼고, 희곡작법을 썼다. 산문집을 내놓기도 했다.


누가봐도 그는 '멋있게' 늙어갔다. 약간의 방황도 있었지만, 시골에서 수목과 어우러지면서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 그는 다시 일어섰다.  희곡집을 발간하고, 인문학 강의를 하며 신바람나는 시간을 구가하고 있었다. 언제나 노트북을 들고 다니며 자판을 두드렸다.


향불을 피웠다. 친구는 국화꽃을 두르고 빙긋이 웃고 있었다. 그의 사진을 보며 저 마음 깊은 곳에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에게 무릎을 꿇어 절을 했다. 한 번, 그리도 또 한 번. 꽂아놓은 향촉에서 은근한 향이 빈소를 감돌았다. 그의 신위神位를 싸고 돌았다. 그 향을 우리는 잠깐 공유했다.

우리가 평소처럼 만났다면 어땠을까. 나라돌아가는 꼴을 말했을 것이고, 자식들 흉이나 보았을 게 분명했으리라. 어쩌면 대학연극반 시절을 짓씹으며 젊음을 내세우며 궁상을 떨었던 지난 날을 돌이켜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저쪽과 이쪽으로 나누어 서있다. 가까우면서도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여, 그대는 지금,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친구 말대로 '과부집 화장실 같은'그의 방에서 희곡을 쓰겠다는 핑계로 라면이나 끓여먹던 일을 끄집어 낼까. 1학년 때 야유회를 갔다 오다가 버스 속에서 승객들과 어울려 노래판을 벌였던 허세를 부끄러워하고 있을까. 남겨두고 가야 하는 자식들을 걱정하고 있을까. 못다쓴 이야기를 가다듬고 있을까.


'친구야. 잘 가게나. 그쪽 동네에도 다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닌가. 거기라고 어찌 사람들의 세상이 아니겠는가. 거기에서 또 다른 세상을 펼치게나. 희곡도 쓰고, 사람들 불러 모아 멋진 무대도 꾸며 보게나. 세상이 어수선한 것을 보면 이제는 마음이나 편히 하고 평소 하던대로 인문학이나 열심히 설파하게나. 그렇게 한 세상 열어보란 말일세. 행복하게나. 행복이 뭔지 정확하게 정의하는것이 쉽지 않지만, 어디 행복이라는 것이 별것인가.'


속으로 그렇게 말해보지만, 마음은 참 불편했다.

"아버지 친구네. 그래도 우리가 한 세상 같이 살았는데 이렇게 자네를 보게 되었네. 어머니 잘 모시고 힘차게 지내게. 그게 아버지가 바라는 것일세."

점심 같이 먹고 강의하러 나간 아버지가 새벽에 싸늘하게 돌아왔는데 아버지 친구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래도 검은 상복을 입고 있는 아들의 손을 잡고 조금은 이 빠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처음으로 친구를 보낸 대학 동창들은 마주 앉아서도 별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다 안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이제 정말 때가 되었구나.

옛날 선배들이 말하던 그 마음이 바로 이런 마음이었구나.

아름다운 소풍의 끝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가까이 다가왔구나.


향불은 말없이 타오르고, 빈소는 슬픈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괜히 숙연해졌다.



많은 양으로 쏟아질 거라던 비는 슬며시 그쳤다. 햇볕을 내놓을 듯 하늘이 얼굴을 풀고 있다. 그 친구가 가는길을 열고 있는 듯하다.

평안하길. 아늑하길, 그리고 영생하길.


그대가 쓴 책 '논論의 연극, 행行의 연극', '자연으로부터의 사색', '소금꽃', '북치는 숲', '전북연극사'도 영원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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