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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뒷산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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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Jun 27. 2024

1화 낮은 산에서 길을 잃다

낮아도 조망 맛집으로 손꼽히는 화성  태행산의 조망



낮은 산에서 길을 잃다.


어느 순간 낮은 산으로 다니고 있다. 집에서 가까운 산들이 모두 낮은 산이기도 하지만, 다리  힘이 빠져나가는 몸이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40년 넘게 산에 다녔다. 언제나 높고 큰 산을 찾았고, 어떻게든 산행거리를 늘려보려는 걸음을 걸었다. 높이 올라가야 멀리 볼 수 있었고, 큰 산으로 들어가야만 깊고 긴 골짜기로 빠져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산행수첩에는 높고 큰 산만 있었을 뿐, 낮은 산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지금 되돌아보면 모두 남을 위한 산행이었다. 즉, 보여주기 위한 산행이었다.



낮은 산에는 산길이 많다. 등성이를 따라 이어지던 산길은 마을만 보면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 내려간다. 봉우리를 넘어 다니던 길은 어느 사이 옆구리를 돌아가는 길이 생겨난다. 산이 낮아 쉽게 내려갈 수 있는 까닭에 아무나, 어디든지 길을 만들어내기 쉽다. 그래서 자기들 편한 대로 오르는 길을 만들고, 한 발이라도 빨리 내려가는 길을 낸다.



용인시 처인구 한숲시티를 안고 도는 산길을 걸었다. 한숲시티ㅡ매능교ㅡ달봉산ㅡ사리째고개ㅡ함봉산ㅡ병봉산ㅡ효제봉ㅡ십자봉ㅡ어산ㅡ한숲시티로 돌아오는 환종주산행으로 총거리는 13.69km이고 느리게 걸어 5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최고봉인 함봉산이 309m이고, 산길이 고속도로 수준으로 나있어 웬만하면 걸을 수 있다. 게다가 숲그늘이 좋아 한여름에도 걷기에 그만이다.

그러나 자칫 낭패를 보기에 딱 좋다. 갈림길이 많고 이정표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봉산을 지나 효제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거의 고속도로 수준이다. 많은 사람들이 걷는 길이기 때문이다. 산길에는 온갖 이야기가 널려있고, 사람들의 족적이 쌓여 있다. 동네분들은 눈을 감고도 걸을 길이다. 재미가 있고, 건강이 있고, 깔깔웃음이 있는 길이다.

그렇다 해도 낯선이에게는 두렵고 겁나는 길이다. 갈림길은 많고, 이정표는 제멋대로이다.  효제봉 앞에서 길은 아무 말도 없이 갈라진다. 하나는 효제봉으로 올라가고, 하나는 사면을 돌아간다. 이럴 경우 대부분은 갈라졌던 두 길이 다시 만나게 된다.



이 봉우리는 효제봉이었고, 효제봉은 십자봉으로 가는 능선이 나뉘는 분기점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에 그런 사실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있어야 한다. 이 봉우리가 효제봉이라는 것을 몰랐던 나는 길을 잃었다. 효제봉을 오르지 않고 사면길로 진행한 탓에 전혀 엉뚱한 곳으로 내려섰고, 약 7km 정도를 더 걸어야 했다.



이 산길을 자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안내가 없어도 산행하는데 큰 문제가 없다. 이미 몸으로 체득한 까닭이다. 그러나 낯선 이들에게는 있어야 할 자리에 이정표가 없었기에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다. 삶의 어느 지점에서 꼭 확인해야 할 일을 확인하지 않거나, 반드시 알려줘야 할 일을 알려주지 않게 되면 큰 사달이 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무심코 행한 일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를 참 많이도 본다. 낮은 산을 걷는 사람의 마음이 느슨해지듯, 공장에서 나사하나를 제대로 조이지 않아서 감당하지 못할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목표가 높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일을 할 때는 철저하게 준비하고, 그렇게 준비하고도 행하면서 확인하고, 신중하게 행동한다. 그러나 일상적이고 특별하지 않은 일은 가볍고 느슨하게 행동하며 진중하기보다는 즉흥적이다.


낮은 산이라고 해서 가벼운 마음과 허술한 복장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많다.  산꾼들은 지리산을 오를 때나, 동네 뒷산을 오를 때나 마음가짐을 단단히 가진다. 사고는 생각지도 못하는 곳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숲그늘이 좋은 산길은 여름철  한낮에 걸어도 좋다. 조망이라도 열리는 전망대 나무그늘 밑이라면 에어컨 바람이 쏟아지는 카페보다 훨씬 나은 휴식처이다. 그렇더라고 발걸음을 조심해야 하고, 아무 말 없이 갈라지는 갈림길 앞에서 세심하게 판단하고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이래저래 인생은 어렵고, 삶은 힘들다. 그래도 피할 수 없으니 열심히 살아야 한다. 길을 잃으면서도 다시 산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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