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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뒷산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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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힘날세상 Sep 03. 2024

4화 익숙함에 대하여

창문너머로 바라보는 숲, 이 숲길을 따라 알량한 상념을 이어본다.


오후 늦게, 집에서 시작하는 숲길을 걷는다. 40년 넘게 돌아다닌 산길 옆에 세워놓으면 이건 축에도 끼지 못한다. 그 흔한 바위 하나 없는 육산肉山이고 제대로 된 오르막도 내놓지 못하는, 그야말로 볼품없는 낮은 산이다.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다. 둘이 걷고, 혼자 걷는다. 셋이 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도시 주변의 낮은 산길의 흔한 모습이다. 셋 이상 걷는 사람들은 그래도 산길을 걸었다는 소위 '산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산꾼'들이 찾아올 만한 산은 아니라는 것이다. 동네 분들이 운동삼아 걷는 길이다. 부부간에, 이웃 간에 슬슬 걸어보는 동네의 숲길이다.


그래서일까. 일상복에 운동화 차림이고, 빈 손이다. 그들에게는 산이 아니고, 가볍게 담소를 나누며 웃음이나 흘리는 친교의 숲길이다.


22년 1월, 이사 온 다음날, 추위를 무릅쓰고 메마른 산으로 들어섰다. 주변 지리를 전혀 모르지만 네이버 지도를 통해 방향만 익혀두고서. 말하자면 간 보기 산행이다. 길은 잘 나 있었다.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도 있고, 갈림길도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오르고 내려 길은 넓고 반들반들했다. 그러나 낯설었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기에 네이버 지도를 실행하고 나의 현재 위치와 비교하며 지리를 익혀가며 걸었다. 운동기구가 있는 봉우리에서 만난 분에게 주변 지리를 물었다.

ㅡ여기는 석산이고, 저것은 노적봉. 기껏해야 160미터야. 시내 건너편에 필봉산, 마등산이 있는데 그것도 비슷해.

봉우리 이름은 몰라도 산줄기가 이어지는 모양으로 보아 높이는 얼추 눈에 들어왔다.

궁금하면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라 일주일 안에 주변 산을 다 올라보았다. 싱거웠다. 그 후로 다른 지역에 있는 산을 찾아다녔다. 경기 남부 지역의 산은 3~400미터 정도의 산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미답지였기에 굶주린 짐승처럼 닥치는 대로 돌아다녔다. 틈틈이 뒷산도 걸었다. 지금은 눈감고도 다닐 정도다.


오후의 숲길은 한산하다. 느긋하게 걷는다. 느리게 걸어야 보이는 것이 많다. 반질반질한 길을 걸으며 이 길을 밟고 걸은 사람들을 생각한다. 걸음마다 그들은 어떤 생각을 담았을까. 자신보다는 가족을 생각했을 것이다. 남편의 건강을 생각하고, 먼저 간 아내를 마음에 담고 걷 않았을까. 멀리 사는 자식들을, 손주들을 그리워하며 걸었으리라.


걸음이 익은 까닭에 자꾸만 한눈을 판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언제나 익숙한 루틴으로 몸이 움직이듯이 뒷산을 걷는 걸음은 긴장감이 없다. 산을 걸어 신선함을 느끼고, 낯선 풍경이 가져다주는 새로움을 즐기지 못한다. 쉽게 다가갈 수 있기에 귀한 모르는 걸음이고, 늘 보는 숲이기에 관찰의 각도가 무뎌지는 것이다. 늘 마시는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고, 창문을 넘어오는 햇볕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매일 같이 산다고 부모의 고마움을 모르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우두커니 자리 잡고 있는 나무그루터기에 앉았다. 기울어가는 해는 조금 후면 붉은 노을을 흘리리라. 어느 순간 어둠이 세상을 덮을 것이고, 사람들은 하루종일 펼쳐놓았던 삶의 시간들을 거두어들이리라. 그때 고요가 슬금슬금 우리들을 짓누를 게다. 그렇게 하루는 여느 때와 같이 내려앉을 것이다. 일어서려고 몸을 일으키다가 발밑으로 이어지는 개미의 행렬을 보았다. 대부분의 개미들은 한 방향으로 기어가고 있는데, 몇몇은 반대로 가고 있다.


개미와 베짱이 동화가 생각난다. 한 여름에도 열심히 일하는 개미. 덥다고, 늙었다고 아무것도 안 하려는 나란 늙은이. 익숙한 숲길 걷다가 새로운 것을 보았다고, 그래서 뭔가 깨달은 게 있다고 좋아하는 늙은이. 개미는 오로지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나뭇가지를 물고 가는 아이, 좁쌀만 한 알갱이를 물고 있는 아이, 아무것도 물지 않고 우왕좌왕하는 아이, 꿈틀거리고 있는 작은 벌레를 끌고 가는 여러 명의 아이. 이렇게 사는구나. 모두들 빠쁘게, 열심히.


퇴직하고 보니 긴장감이 떨어지고, 열심히 사는 것도 아니고, 계획도 없이 그냥 되는 대로 하루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아무렇지도 않고, 무언가 조급하지도 않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인가. 부지런한 몸놀림을 보이고 있는 개미들을 보고도 그저 그러려니 할 수 있는 것이 노년의 삶일까.


뒷산은 말이 없고, 숲길은 조용하기만 하다. 허탈함이 밀려오는 듯한 마음으로 나만 홀로 터벅터벅 걷는다. 익숙함에 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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