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내릴 거라더니 흰 몸뚱이 다 드러내고 새벽녘에 내린다. 부끄러웠을까. 얼른 제 몸을 숨겼다가 다시 내보이며 하늘만 흐려놓는다.
자최눈은 되종그라진 홀시어미만큼이나 씀벅거린다. 최승호의 대설주의보나 이청준의 눈길을 만들어낸 함박눈보다 야박하다. 옆집 택시기사가 들으면 성을 낼지도 모르지만 눈은 푸짐하게 내려야 한다. 세상을 잠재울 만큼 쌓여 낙엽처럼 말라버린 사람들 마음을 적셔줄 일이다.
신새벽부터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헤살거리는 눈은 나뭇가지에 주저앉지도 못하고 허공이나 떠다닐 뿐이다. 다소곳하게 머물지 못하는 것이 그대로 내 마음이다. 제대로 된 눈의 결정체가 육각형이라는데 저것이 내 마음과 같다면 볼썽사납게 찌그러진 모양이리라.
그냥 그런 거라고, 지나가면 그만인 거라고, 늙어서 손아귀의 힘이 빠지는 것은 움켜쥐지 말라는 거라고, 그러니 세상 좀 놓아버리라고. 판단하지 말고, 계획하지 말고, 이리저리 재지 말고, 돈 아깝게 생각하지 말고, 지나치게 절제하지 말고, 먹고 싶은 거는 맘대로 먹으라고, 중요한 것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라고,.
마음이 어수선할 때마다 떠올리는 것인데 돌아보면 언제나 그렇게 하고 있다.
내려앉지 못하고 허공을 떠다니는, 가늘어서 제 자취도 보이지 않는 가루눈처럼 스산한 마음을 들고 참 오랫동안 창밖을 바라봤다. 나도 겨우 발자국이나 남길까말까한 자최눈이라는 생각이 든다. 눈이 메말라서 얼른 인공눈물을 넣는다.
자최눈도 오랜 시간을 내리다보면 제법 뚜렷한 발자국을 찍히게 한다. 나는, 내 걸음은 무엇을 남겨놓았을까. 아니, 무엇을 위하여 스스로 포충망을 뒤집어 쓰는 걸까. 사람이니까 그런 거라고?
세상을 희뿌옇게 가두어 놓은 자최눈은 하루 종일 하늘을 덮을 것 같고, 나는 그만큼 눈을 맞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