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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박웅현, <여덟 단어>

8. 인생人生 - 단어 하나에 담긴 삶의 무게

by 힘날세상


박웅현이 말하는 여덟 단어 중 마지막은 '인생人生'이다. 인생에 대해서 여덟 단어로 말해보겠다고 하더니 마지막에 내놓은 게 '인생人生'이다. 뭔가 종합을 해보려는 것일까.



그는 박범신의 소설 '촐라체'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길고 위험이 넘치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시간을 살아가야 할 이제 겨우 스물한 살의 청년'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전인미답.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걸어가야 하는 위험한 나니 20대, 그리고 30대, 40대, 50대...... 아마도 인생은 젊음이건 아니건 누구에게나 전인미답이 아닐까요? 그래서 늘 위험하지만 또 한편으로 매 순간이 흥미진진한 것이 바로 인생일 겁니다.



누구도 걸어보지 못한 길. 그래서 위험하고도 흥미진진한 길.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책을 덮었다. 지금까지 들어온 일곱 개의 단어, 자존, 본질, 고전, 견, 현재, 권위, 소통은 결국 인생에서 필요한 요소라고 했으니 굳이 그것들을 뭉뚱그려 내놓으려는 것을 꼭 읽어야 할까. 말하자면 박웅현을 밀어내보자는 심사가 아닐 수 없다. 한편으로는 그가 도달하려는 종착역에 내 걸음을 걸어 도달해 보자는, 말하자면 배은망덕이다. 풀코스 마라톤에서 결승선이 다가오면 처음부터 동반주해 준 분을 사정없이 내팽개치고 마치 저 혼자서 달려온 것처럼 치고 나가는 것처럼.



고희의 문턱에 서고 보니 걸어야 할 시간보다 걸어온 시간들이 훨씬 많다. 박웅현의 생각대로 말하자면 위험하기보다는 흥미진진한 길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제는 좀 무너지고 틀어진다고 해도 숨이 멎을 만큼 무서워할 것까지는 없을 떼니까.



'황혼은 아름답다'라고 우기며 살고 있다. 걷는 걸음에서 어느 순간 비틀거리는 것을 보기도 하고, 내가 지금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가 헷갈릴 때도 있다. 멀리 있는 것, 가까이 있는 것들이 흐릿하게 보이고, 심장의 박동 또한 자꾸만 힘을 잃어간다. 산길을 걷는 걸음이 갈수록 느려지고 지면을 박차고 나가야 할 발바닥이 힘을 잃어간다. 책에 담겨 있는 글이 정연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키보드를 두드릴 때 감당하지 못할 만큼 오타가 많이 난다. 한 때 닦아놓고 쌓아두었던 단어들이 어디론가 숨어버려 자판 앞에서 허둥거리고 있다. 친구 말대로 삶의 끝부분에 서 있다.



인생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거기에다 인생을 좀 그럴듯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까지 말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그런데도 박웅현은 그걸 말해보겠다고 했고, 일곱 개의 날카로운 비수를 던졌다. 그러고도 힘이 남아 더 크고도 예리한 장검長劍을 휘두르겠다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물론 그는 '시류에 휩쓸리지 마시길, 당대는 흐르고 본질은 남는 것, 멘토를 맹신하지 마시길' 이런 전제로 책을 쓰고 있다. 막말처럼 말해보면 내가 하는 말 너무 믿지 말고 여러분 스스로 '정답을 만들어 가'라는 것이다. 역시 대단한 광고쟁이다.



귀 기울여 주시되 큰 기대는 하지 않길 바랍니다. 인생은 강의 몇 번, 책 몇 권으로 변하지 않으니까요. 만약 강의 몇 번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정리해 주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의심해봐야 합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언컨대 이 여덟 번의 강의도 여러분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여러분과 이 여덟 가지 단어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대단하다.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는 그의 치밀함에 나는 또 다시 무너졌다. 그리고 그가 쓴 책 <책은 도끼다>와 <다시 책은 도끼다>를 샀다.



몸이 늙었고, 내가 걸어온 걸음은 낡았다. 거기에다 걸을 수 있는 걸음의 양은 많이 남아있지 않고, 걸음의 질은 형편없다. 그렇다면 이 따위 <여덟 단어> 같은 책은 진즉 코웃음이나 치고 던져버려야 했다. 그런데도 마지막까지 읽고 다시 넘겨 읽어대는 것은 그가 말한 '함께 생각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 다섯이 강원도에서 저마다의 걸음을 걸었다. 그리고 그 걸음들을 남김없이 끌어 모아 여행에세이를 썼다. <우연히 ㅡ 잠시라도>. 그들이 내세운 여행의 갈피는 '머묾'이다. 지니가지 말고 걸음을 멈추어 서보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머물면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눈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세상. 그들은 느리게 걸었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멈춘 걸음 위에서 세상을 받아들였다. 문득 느리게 걸어야 보인다는 말을 생각했다가 좀 겸연쩍었다.



박웅현의 마지막 단어, '인생人生'에서 나도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좀 오래 머물렀다. 내가 이 책을 썼다면 어떻게 '인생人生'을 말할까. 그리고 후회했다. 그냥 박웅현이 말하는 것을 읽어버리는 게 나았을 텐데. 다섯 젊은이들처럼 걸음을 멈추고 머물러보기로 했다.


'현재現在'. 그가 말한 카르페 디엠 Carpe diem.


1999년 춘천에서 처음으로 마라톤 풀코스를 달렸다. 3시간 57분. 35km를 지나면서부터는 나를 잃어버렸었다. 숨을 쉬고 있었을까. 내 눈이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심장은 뛰고 있었을까. 내 의식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은 오직 쓰러질 것 같다는 육신肉身의 피어린 외침이었다. 길가에 주저앉아 달리기를 접어버린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끝은 그들이 주저앉아 있는 길바닥이 아니었다. 무너질 듯 비틀거리는 것일지라도 내 걸음을 더 쌓아야 결승선에 닿을 수가 있었다. 풀코스 마라톤은 지금 내딛는 걸음걸음으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으로 달렸다. 춘천종합운동장 결승선에서 쓰러졌다.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을 울었다.



인생은 결국 현재의 조각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풀코스 마라톤이 비틀거리는 걸음걸음으로 이루어지듯이. 여기에 답이 있다. 현재. 박웅현이 말한 카르페 디엠 Carpe diem. 현재를 즐기라는 게 아니라, 현재에 충실하라는.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현재의 순간들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길고 긴 인생을 토실토실하게 살찌울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풀코스 마라톤을 달리면서 내딛는 한발한발에 최선을 다해 집중해야 하고, 산길을 걸을 때 걸음걸음에 의미를 두면서 걸어야 정상에 이르는 길에 의미가 담기는 것이 아닐까.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밤은 책이다>에서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살고 싶고,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 살고 싶다"라고 했다. 이것은 "현재"에서 말한 '개처럼 살자'는 말과 일치한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이 중요하다. 지금 이 순간을 살면서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고전'이 왜 필요한지,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아야'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자존'을 바탕으로 '소통'하며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박웅현이 말하는 '인생'이다.


무더위가 제 세상인 양 활개치고 있다. 그래? 그렇다면 무더위와 더불어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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