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여행에는 저마다의 걸음이 있다.
봄이 시작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런데도 여름이 온 듯한 더위를 몰고 왔다는데, 시드니는 아침부터 비를 부르고 있었다. 여행객들에게 비는 손에 든 비닐봉지처럼 거추장스럽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마음으로 파고드는 낭만이기도 하다. 객창감客窓感을 한껏 불러일으키는.
창문을 넘어오는 나무 한 그루는 노보텔 호텔을 등에 업은 채 온몸으로 비를 맞고 있었다. 어쩌면 봄의 두께를 더하는 빗줄기 앞에서. 다가서는 바람까지 안아버린 키 큰 나무는 꼭대기를 흔들어 하루의 문을 열고 있다.
비가 그칠 때까지 숙소에 앉아 있기로 했는데
ㅡ할아버지, 밖에 나가실래요?
창 너머로 빗줄기를 바라보던 손자가 애써 가라앉히고 있는 늙은이의 감정을 후빈다.
ㅡ비 오는데?
ㅡ우산 받고 돌아다니면 좋잖아요.
불감청不敢請이나 고소원固所願이라고 아이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나선다.
ㅡ어디로 갈까?
ㅡ어디든지 다 좋아요. 우산만 있으면요.
1일 투어를 나설 때 지나다녔던 텀바롱 공원Tumbalong Park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공원은 동그마니 비에 젖고 있었다. 공원을 차지하고 있던 비둘기 떼들은 비를 싫어하나 보다. 자기 세상인 것처럼 공원을 모두 차지하고 있더니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러닝 하는 사람들도 오늘은 신발을 벗어버렸나 보다. 공원은 그냥 고요한 우雨요일을 펼쳐 놓고 있다.
중국식 정원 앞에 섰다. 차이니스 가든 오브 프렌드십Chinese Garden of Friendship. 높은 담을 두르고 있어서 정문으로 간다.
ㅡ중국식 정원이 있는데 가볼까?
ㅡ호주에 왜 중국 정원이 있어요?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손자가 묻는다.
ㅡ중국에서 살았던 것 기억나?
네 살 즈음에 아빠가 중국에서 생활할 때 1년 반 정도를 중국에서 지냈다. 중국 유치원에 다녔는데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선생님들의 말을 어느 정도 알아들었고, 누나와 중국어로만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할 정도로 빠르게 중국어를 습득해 갔다.
ㅡ아무것도 생각나는 게 없어요. 그래도 가보고 싶기는 해요.
ㅡ그렇구나. 중국 어디가 가고 싶을까?
ㅡ엄마가 북경이랑 상해, 샤먼도 갔었다고 하는데 모르겠어요.
어렸을 때라 눈으로 본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
ㅡ그런데 저는 스페인이 가고 싶어요.
ㅡ스페인?
ㅡ네, 바르셀로나에 가서 가우디 성당도 보고, 축구 경기도 보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 스페인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어요. 누나는 중국어를 배우고 있는데 저는 중국어는 별로예요.
중국식 정원 정문은 닫혀 있었다.
ㅡ그런데 입장료도 받는다고 써 있어요.
ㅡ그렇구나. 열려 있었어도 돈이 없어서 못 들어갈 뻔했다.
ㅡ아마 들어가 보아도 별 거 아니었을 거예요. 여우가 포도를 따 먹지 못하니까 저 포도는 시어서 못 먹을 거라고 하잖아요. 여기도 그럴 거 같아요.
ㅡ너 여우와 포도 이야기도 알아?
ㅡ그럼요. 책에서 읽었어요. 엄마가 그 뜻을 알려줬어요.
책 읽은 효과가 있긴 있는 모양이다.
ㅡ시드니에 여행 와보니 뭐가 좋아?
ㅡ한국에서 책으로만 보던 것들을 볼 수 있고, 맛있는 것도 먹고, 다른 나라 사람들도 보는 거요. 그런데 호주에는 학교가 없나 봐요.
ㅡ왜 없겠어.
ㅡ그런데 돌아다니면서 봤는데 학교나 학생들을 한 번도 못 봤어요.
ㅡ우리가 학교가 없는 곳으로 돌아다녀서 그러지 않았을까?
ㅡ그리고 또 병원도 못 봤어요.
ㅡ그렇긴 하다. 할아버지도 병원은 못 본 거 같다.
ㅡ우리나라와 달리 가게의 간판도 화려하거나 크지 않아요.
제 누나와 장난이나 하면서 그냥 따라다니는 줄만 알았는데 제 나름의 시각으로 보고 다니고 있었다니. 세뱃돈이나 여러 가지 이유로 받은 용돈을 지갑에 넣어 자기 책상 서랍에 간직하고 있어서 물었더니 스페인 여행 갈 돈이라고 하더니 데리고 가야 할 것 같다.
ㅡ그럼 안 좋은 것도 있을까?
ㅡ제가 학교를 안 가서 분리수거가 걱정돼요. 아침마다 제가 일찍 가서 하거든요.
ㅡ다른 친구들이 하겠지.
ㅡ영준이가 하면 좋겠는데, 아마 하겠죠. 영준이 태국 갔을 때 제가 영준이가 맡은 일을 대신해주었거든요.
빗줄기가 거세졌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호텔 건물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건물, 여인의 얼굴, 나무 등.
ㅡ할아버지, 건물에 그림이 그려져 있어요. 저는 유리창에 비치는 그림자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까 그림이에요.
ㅡ그렇구나. 네가 나보다 훨씬 낫다. 저런 것도 다 보이고.
여행에는 저마다의 걸음이 있다. 열 살이나 일흔 살이나. 자신의 걸음으로 걷고 자기만의 시각으로 보고 받아들인다. 잠깐이지만 둘이만 있어보니까 손자의 속을 조금 들여다본 것 같다. 과자나 사 먹고 싶고, 놀이기구나 타고 놀고 싶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일정을 짤 때 아이들의 눈높이도 고려해서 계획을 세우기는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제 나름의 시각으로 보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대견하다. 이런 것을 보면 여행은 살아있는 교육이다.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삶의 현장에서 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이면서 체화體化하게 하는 것도 아주 좋은 교육이다. 어른들은 스쳐 지나가는 것도 아이들은 눈여겨보며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다. 블루마운틴 봉우리들이 지붕처럼 평평한 모양을 이루고 있는 이유가 퇴적층이 융기하고, 침식이 일어났기 때문이라는 가이드분의 말을 듣고 왜 우리나라 지역에서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느냐고 물어본 것은 아이들이었다. 엉뚱한 말과 행동을 하는 것들이 어쩌면 아이들 입장에서는 사고의 확장이 아닐까.
비는 갈수록 세차게 내리고 내 마음에도 흡족한 감정이 흠뻑 담긴다. 역시 여행은 살아있는 발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