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하이드 공원Hyde Park을 즐기는 사람들
언제 어디서든 비가 좀 많이 내린다 싶으면 대학 연극반 때 연습만 하고 공연은 하지 못했던 이강백의 희곡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라는 작품을 생각하곤 하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그랬다. 날씨와는 무관한 요절복통하지만 어딘가 찡한 느낌이 나는 사기극.
시드니까지 와서 이런 연극을 생각하는 건 연극이 내놓는 주제인 변덕스러운 상황이나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본질이나 마음을 지키려는 의지 때문이다. 그러니까 뭔가 있는 듯이 거창하게 포장하고 있지만 비가 와도 할 건 해야 한다는 지극히 값싼 생각일 뿐이다.
그러나 허망하게도 우리가 아침잠인지 오전잠인지 설핏하게 늘어져 있다가 점심을 먹고 창밖을 보았을 때는
영원히 그치지 않을 듯 내리던 빗줄기가 봄기운에 밀렸는지 힘을 잃고 주저앉고 있었다. 쨍한 하늘을 아니었지만, 밖으로 뻗어가는 마음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나가야 한다. 우리는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비가 걷힌 거리는 상큼한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딱 걷고 싶은 마음. 하이드 공원으로 슬슬 걸어간다. 1,3km 정도는 한 발로도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하이드 공원은 시드니 동쪽에 있는데 시드니에서는 가장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1810년에 조성된 역사가 있는 공원이다. 넓은 잔디밭과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노거목老巨木의 이야기가 촘촘하게 박혀 있는 곳. 가운데를 통과하는 도로로 인해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다. 북쪽에는 아치볼드 분수Archibald Fountain, 나고야 가든Nagoya Gardens이 있으며, 남쪽에는 앤잭 전쟁 기념관ANZAC War Memorial이 자리 잡고 있다. 공원 주변에는 세인트 메리 대성당St Mary's Cathedral, 호주 박물관Australian Museum이 위치해 있어 공연과 연계하여 돌아보기 딱 좋은 곳이다. 비가 오지 않았으면 하루 종일 즐길 수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쉬움이 크다.
* 아치볼드 분수 (Archibald Fountain)
J.F. 아치볼드Archibald의 기부금으로 1932년에 세움. 호주 연합군이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참전에 기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축가 프랑수아 시카르François Sicard가 설계했으며 청동 조각상과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분수이다.
* 앤잭 전쟁 기념관ANZAC War Memorial
호주와 뉴질랜드 연합군(ANZAC: 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의 1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들을 기리는 기념관으로 놀라운 건축미를 자랑하며, 전시 및 해석 공간을 통해 호주 군사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에게 위로의 장소이기도 하다.
*나고야 가든Nagoya Gardens
거대한 체스 판이 바닥에 그려져 있어 실제로 체스를 즐길 수 있다.
아치볼드 분수 앞에서 한참을 머무른다. 조각상 하나하나를 들여다 보고 제1차 대전 참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는데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다. 어쩌면 전쟁이 끝나고 찾아올 평화로운 세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저 아름답다고 조화롭다는 생각만 들었다. 분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에 무지개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그려보다가 설계자의 의도를 평화로운 세상을 지향하는 마음이라고 내 마음대로 단정 지어버렸다.
우리는 누구나 평화를 지향한다고 생각한다. 강력한 무기를 지닌 군대를 내세우며 나라를 지키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군대를 동원하여 이웃 나라를 공격하고, 자기 나라 국민들을 짓밟는다. 그렇게 사람이 죽는다. 무기를 가지지 않은, 그야말로 평화를 꿈꾸는 자들이 억울하게 희생된다. 그것을 우리는 지금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어떤 이유로도 용서되지 않는 전쟁을.
대형 체스판이 그려져 있는 체스 광장이 있다. 시드니 노인들이 체스를 즐기고 있다. 체스 국가대표를 꿈꾸고 있는 손자는 날카로운 눈매로 대국을 지켜보고 있다.
ㅡ할아버지들 실력이 대단하신데요.
ㅡ그래서 저 할아버지들과 대국하면 이길 것 같아?
ㅡ쉽게 지지는 않을 것 같아요.
ㅡ그럼 한 판 둘 수 있겠느냐고 여쭈어 봐. 오감랭귀지에서 배운 영어가 있잖아.
ㅡCan you play a game of chess with me?
쭈삣거리더니 게임에서 이긴 할아버지에게 오그라든 목소리로 말한다.
ㅡ All right. Let's play.
미심쩍다는 듯이 바라보는 노인에게 딸이 손자의 실력을 말해 주니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는다.
그리고는
ㅡYour goal is to beat me.
꼭 자기를 이기라고 말한다.
손자는 백을 선택해서 말을 배열한다. 체스에서는 일반적으로 하수나 연하가 백을 잡고 먼저 둔다. 대회에서는 흑백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결정하지만 친선 경기에서는 그렇게 한다. 우리가 장기를 둘 때 홍청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가 있다.
손자는 제 나름의 방법으로 진을 짜면서 경기를 이어간다. 노인도 여유 있게 말을 움직이며 경기를 펼친다. 경기는 팽팽하게 진행되었다. 노인도 전력을 다하는 듯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노인들이 한 마디씩 한다. 대개는 손자가 만만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노인이 매섭게 몰아붙이며 승기를 잡았고, 손자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ㅡThat was a tough game, well played!
경기를 마친 노인이 엄지를 치켜세우더니 손자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해 준다. 손자는 서운한 듯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ㅡ두어보니 어때?
ㅡ제가 이길 수 있었는데 한 수를 잘못 두는 순간 할아버지가 날카롭게 공격하여 졌어요.
ㅡ그래도 잘한 거야. 다음에는 더 잘할 거야.
ㅡ그런데 할아버지가 체스를 두는 전략이 특이해요.
손자는 학원에서 정통으로 배우고 있고, 노인은 그야말로 야전에서 오랜 경험으로 축적된 체스이기에 손자가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탁구장에서 선생님께 제대로 배운 탁구와 오로지 오랫동안 치면서 스스로 익힌 탁구의 차이일 것이다. 폼은 엉성하지만 웬만한 공을 다 받아치고 공격하는 만만치 않은 실력의 소위 야전탁구 말이다.
어쨌든 시드니에서 여덟 살짜리가 할아버지와 체스를 두다니. 그것도 날 것 같은 할아버지와. 손자에게는 두고두고 기념이 될 것이다.
세인트 메리 대성당St Mary's Cathedral이 건너다 보인다. 호주 가톨릭 공동체의 영적인 중심지로 1821년에 지어졌으나 화재로 소실되어 1868년에 재건축을 시작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완성되었으며, 특히 쌍둥이 첨탑은 2000년에야 완공되었다고 한다. 노란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사암砂岩, Sandstone으로 외벽을 지어 햇빛이 비치면 장엄하게 빛난다고 한다. 미사 외에도 관광객에게 개방된다고 하는데 박물관과 아름답다는 QVB을 구경하기로 해서 아름다운 외관을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하이드 공원이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거대한 나무들이 늘어서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나 노거수老巨樹는 위엄으로 다가온다. 위압감에 사로잡히게 한다. 마을에 몇 백 년 된 나무가 한그루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를 보라. 오늘 하이드 공원에는 그런 나무들이 500여 그루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큰 나무는 넓고 짙은 그늘을 만들고, 넓고 짙은 그늘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마음이 넉넉해지고 편안해지는 것도 다 나무가 내주는 그늘 때문이다. 나무로 인해 마음이 편안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니 삶을 대하는 자세가 유순해지고 느긋해진다. 그것은 공원이 주는 혜택이고 선물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공원으로 모여든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이드 공원을 즐기고 있었다. 일정이 바쁜 우리도 덩달아 마음이 편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