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길 김주영 객주길

04 그래도 꼭 지녀야 하는 것

by 힘날세상


신기리 느티나무는 아무 말없이 서 있었다. 어제 진보면 하나로마트에서 사가지고 간 빵을 먹으면서 무언가 이야기하기를 기다렸지만, 내게 다가온 것은 황량한 바람뿐이었다. 350년 동안 세상을 지켜봤으면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을 터인데 입을 꼭 다물고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어쩌면 말하지 않는 것으로 말하는 것일까. 구구절절 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고 있다는 것일까.


말하지 않아도 나무는 350년을 애써 지니고 있는 것이 있을 터, 인간은 그 앞에서 끝없는 탐욕을 부리고 살면서도 손톱만큼의 부끄러움이나 양심이 찔리는 것을 모르고 살고 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비 한 번 내리면, 바람 한 번 불면, 불 한 번 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면서 언제나 자신을 앞세우려 하고 모든 것들의 위에 서려고 한다.


걸음을 재촉하는 아내의 지청구에 3길을 시작한다. 느티나무를 향해 마음을 숙인다. 무언가 새로운 다짐을 하기도 했지만, 나는 안다. 감곡교를 건너기 전에 나는 다시 세속에 물들고 탐욕의 늪에 빠져들 거라는 걸.


외씨버선길을 걷겠다고 내려올 때 허울 좋게도 마음먹은 것은 그래도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삶의 찌든 때를 조금이라도 씻어내 보겠다는 것이었다. 청마 유치환 시인처럼 내 육신을 '아라비아 사막' 그 가혹함 속으로 들이 밀어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찾으면 좋겠지만, 그냥 들여다볼 수만 있어도 내가 걷는 걸음은 생생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감곡교를 건너자마자 감곡마을 숲에서 마음은 흩어졌다. 잘 가다듬어 놓은 소나무 숲은 이리저리 사잇길을 이어놓고 있는데, 자꾸만 힘이 빠지는 걸음은 '아라비아 사막'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아픔 속에서 싹트고 있는 '원시의 본연한 자태' 같은 것은 청맹과니가 되어가는 나에게는 한순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의 걸음은 단순하고 무미건조한 이동에 불과한 것이었다.


ㅡ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ㅡ생각은 무슨.....

아내의 물음을 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내가 부끄러운 탓이다.

ㅡ그냥 보이는 대로 보고, 느끼는 대로 받아들여.

ㅡ길가에 뒹구는 돌멩이에도 도道가 있다고 하는데.....

ㅡ그런 시각이야말로 강박관념이고 그러면 마음이 복잡해지고, 걸음도 흩어지고, 그렇게 악순환하는 거지. 결국은 아무것도 잡을 수 없을 테고.


나는 내가 생각해도 참 어이가 없다. 곁눈질을 하려는 것이다.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쪽을 내 마음대로 그려보려고 하고,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그 모습을 버리고, 엉뚱한 것을 가져다 놓으려고 한다. 3학년 때 "시론詩論" 수업을 들을 때 교수님이 하신 말씀 때문이라고 나는 우기고 있다.


ㅡ시는 관찰에서 나온다. 그러나 진짜는 관찰하지 않은 것에서 나온다. 바라보았으면 다른 곳으로 한 번 갔다가 와야 한다. 국화를 보고 국화만 말했으면 서정주는 시인이 아니다. 내 누님을 내놓을 때 서정주의 시는 우리 가슴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사실 감곡 마을 숲 물구나무를 선 소나무 앞에서 그 소나무를 제대로 들여다보기도 전에 자은도 분계해변의 여인송을 그려내고 있었다. 비교하고 대조하고 들여다보고. 비련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분계해변 여인송의 눈물을 아무런 이름도 얻지 못하고 있는 소나무 위에 투영해 보았다. 개체는 달라도 어렵게 살던 시절 여인들의 애환은 똑같지 않으냐고. 내 걸음은 늘 이런 식이다.


감곡 마을 숲의 소나무(좌)와 자은도 분계해변의 여인송(우)


수없이 많은 소나무가 불에 탔다. 그에 못지않게 주민들의 마음도 새카맣게 탔다. 나무도 타고, 마을도 타고, 사람들의 마음도 모두 불에 탔다. 뜨거운 불길에 휩싸였던 산등성이나 골짜기에는 나무들의 비명만큼이나 안타까운 마을 주민들의 고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수정사 부근 골짜기에서 소를 키우고 있는 분은 그때는 생각도 하기 싫다고 했다.


ㅡ사람도 사람이지만 소들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아무 정신이 없었죠. 천만다행으로 불길이 축사까지는 번지지 않았지만 그때 소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한동안 사료를 먹지 않았었다니까.


모든 것이 타버렸다고 분노의 표정을 짓던 사람들 곁에서 폭우에 삶의 모든 것을 잃었다며 허탈한 표정을 짓던 늙은 농부를 생각했다. 김주영 객주 문학관에서 보부상들의 삶의 무게가 담긴 걸음을 보면서 아파트 쓰레기장에서 경비원들의 눈길을 피해 빈 병을 주워 담던 그 할머니를 떠올렸다. 평생을 일곱 남매들의 디딤돌이 되어 굽어 살았던 어머니의 얼굴을 그리고 있었다.


무엇인가. 나는 이 길을 걸어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분명한 답을 내놓지 못하더라도 꼭 지녀야 하는 것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사람의 마음인지, 보편적인 사랑인지 아직도 모른다.


3길 김주영 객주길 걷기를 위한 TIP

진보터미널 부근에 주차하고 청송행 버스를 타고 청송정원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걷기 시작하면 됩니다. 3길 도착점인 시량 2리(송이골) 정류장에서 진보터미널까지는 약 6km 정도이고 버스는 대략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합니다. 버스를 기다리기 어렵다면 진보택시를 이용해도 됩니다. 참고로 저는 2길과 3길 약 28km를 한꺼번에 걸었습니다.



https://www.be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