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길 조지훈 문학길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by 힘날세상

침대는 적당히 푹신했으며 아침잠을 즐기기에 충분할 만큼 아늑했다. 체온이 녹아든 이불속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생각과 함께 다시 잠에 빠져 들었다. 아침잠을 즐기는 일은 저녁형 인간인 나에게는 흔한 일이다. 재밌는 것은 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다 들으면서 잔다는 것이다. 그게 아침잠의 참맛이라고 늘 치부하고 있다.


낯선 곳에 와서, 익숙하지 않은 침대에서 아침잠에 빠질 줄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었다. 이불속을 빠져나오면서 참 겸연쩍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하루를 시작한 해가 느긋하게 햇볕을 채워 넣고 있는 버스에 앉아 오늘 걸어야 할 걸음을 그려본다. 오늘은 코스를 둘로 나누어 걷기로 한다. 일월면 삼거리에서 영양전통시장까지 걷고 나서, 차를 타고 일월면사무소로 가서 영양 향교를 지나 주실 마을 조지훈문학관까지 걸어 조지훈 시인의 시세계를 흠뻑 들이마시며 마치려고 한다.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고 했던 조지훈 시인.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온갖 잡것들. 시인은 그것을 번뇌라고 했고, 그 정신적, 육체적 온갖 잡것들을 이겨내고 밀어내야 한다고 했다. 별빛. 시인은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승화'라고 가르치고 배웠다.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번뇌'를 우리는 이겨낼 수 있을까. 밖으로 밀어낼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승화'라는 말을 쉽게 받아들인다.


ㅡ여기에서 내리셔서 조금만 걸으면 면사무소입니다.

기사가 일월 삼거리 파출소 앞에 차를 세우며 말한다. 승객은 우리뿐이었다. 외씨버선길에는 사람이 없다. 어느 곳이나 시골은 다 똑같겠지만. 빈 차가 되어 몸이 가벼운 듯 버스는 주실마을 방향으로 휑하니 내달았다. 버스가 떠나간 자리에는 서성거리는 우리의 발걸음만 덩그러니 남았다.


곡강교를 건너 작은 마을을 지나면 숲길이 이어진다. 양심 장독대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마시고 길을 잃었다. 정신을 집중하지 않은 탓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뚜렷하게 보이는 직진길은 어느 분들의 가족묘로 가는 길이다. 내가 걸어야 할 길이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거리낌 없이 그 길을 택했고, 나의 걸음은 흩어졌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어느 것 하나 쉽지 않다. 그것을 조지훈 시인은 '세사에 시달'린다고 했나 보다.


돌아보면 참 많이도 길을 잃었다. 그때마다 통곡을 했다면 나는 울음을 그치지 못했을 것이고, 그때마다 주저앉았다면 나는 일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은 그만큼 살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가족과 이별을 해야 했고, 돈을 잃었다. 수술대에 누워야 했으며, 가까웠던 사람이 어떻게 등을 돌리는지를 봤다. 숨이 쉬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다시 또 그런 시간을 지나야 한다면 차라리 눈을 감겠다고 할 것이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서 나는 조지훈 시인이 말한 '번뇌'를 생각했고, '별빛'을 품으려고 했다.


숲을 나선 길은 상원로라는 이름을 가진 2차선 도로를 따라 이어졌다. 반변천 건너 보이는 논두들 마을로 바로 가면 되는 것을 한참을 돌아간다. 지리산 둘레길, 진안고원길, 제주 올레길, 군산 구불길, 남해 바라길, 남파랑길, 서해랑길, 내포문화숲길. 어느 길을 걸을 때나 바로 가지 않고 에둘러 돌아가는 길을 꼭 만난다. 거의 대부분 가로막는 자연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까닭이다. 돌아가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힘이 빠지는 듯하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대산 비로봉에서 상왕봉을 거쳐 북대사에서 상원사로 내려오는 길을 자주 걸었다. 북대사에서 상원사는 임도를 따라 내려오게 된다. 그런데 중간에 상원사로 바로 내려오는 길을 만난다. 거리가 가깝지만 그만큼 고생을 해야 한다. 가파르고 험한 탓이다. 대개는 임도를 따라 조금 더 걸어 편안하게 내려온다. 그러나 그 갈림길에 서면 은근한 유혹에 빠진다. 바로 내려가는 길이 험하여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순간 심한 갈등에 사로잡히게 된다. 결국 지름길로 들어서지만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제야 돌아가더라도 편안하게 내려가는 길을 택해야 했었다고 후회하게 된다.


상원 3리 마을회관을 지나 논두들 마을까지 강물을 따라 걸으면서 돌아서가는 길이 삶을 바로 이끌어준다는 것을 오늘 다시 한번 떠올린다. 외씨버선길을 힘들게 걸어 얻어내는 값진 깨우침이다. '별빛'에 대한.


영양읍 숙소에 세워 둔 차를 타고 일월면사무소로 갔다. 점심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았으나 한 곳도 없다. 그래 한 끼쯤 건너뛰면 어떠랴. 면사무소 뒤편에 주차하고 향교로 가는 길을 따라 걷는다. 고추밭에서 몇 분이서 고추를 따고 있다. 잘 익은 빨간 고추. 영양이 자랑하는 농산물이다. 모두 수레 같은 것을 타고 다니면서 작업을 하고 있다. 작은 바퀴가 달려 있어서 걸터앉아 발로 밀면서 이동한다. 앞에는 고추를 담을 수 있는 자루를 걸어 둘 수 있는 자리도 만들어 놓았다.

ㅡ이것 없으면 일 못한다.

ㅡ이거 만든 사람 상 줘야 한다카이.


고추 심어서 밥 먹고 살았고, 자식들 대학까지 가르쳐서 도시로 내보냈으니 고추가 효자라고 입을 모은다. 주름진 얼굴에서 굴곡진 삶의 일면이 드러난다. 아픔이고 즐거움이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살아왔다. 마음이 아프고 몸뚱이가 힘들어도 가족을 생각하며 견디며 살았다. 자식을 기르는 것이 어떠한 보상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모의 마음으로 참아내고 이겨냈다.


일월향교는 굳게 닫혀 있다. 문을 한쪽 열어둘 만도 한데 대문 앞에 널려 있는 고추 멍석만 바람을 맞고 있다. 한때는 동몽선습을 배우려는 학동들이 드나들었을 대문은 육영루育英樓라고 쓰인 현판을 내보인 채 2층으로 솟아올라 그 육중함을 드러내고 있다. 여러 향교를 보았지만 이렇게 웅장한 문루는 처음이다. 다섯 칸의 2층 누각은 웬만한 관아의 정문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위엄이 서려 있었다. 닫혀 있는 문은 그 위엄을 더하는 듯하였고, 돌아서는 나의 발걸음은 그만큼 위축되었다.


조지훈 문학관은 주실마을 입구에 자리를 잡았는데 거대한 한옥 건물이 눈길을 끌었다. 월요일이라고 문을 닫았다. 주실마을로 들어가 마을의 분위기를 즐기면서 조지훈 시인의 생가에 앉아 있는데 파란 가을 하늘이 마음에 내려앉았다. ㅁ자 형태의 영남 북부의 양반가 한옥. 호은종택壺隱宗宅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솟을대문 안에 팔작지붕 처마의 은근한 곡선미가 파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다. 할아버지가 구한말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쳤다고 하는데 대문에 걸려 있는 태극기는 일제강점기에는 아예 문설주에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삼불차 三不借(학문, 재물, 사람을 빌리지 않는다.)의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는 가풍은 선비의 기개氣槪일까. 그 안에서 조지훈의 시정신은 싹이 텄고, 주실마을의 기운을 이어 그의 시세계가 열렸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의 시를 새겨 놓은 시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승무도, 고풍의상도 아닌 '병病에게'라는 시를 그려보며.



병(病)에게

- 조지훈 -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잊고 지내다가도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를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虛無)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 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리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그려.


오늘 걸었던 걸음에 담아보려고 했던 화두話頭. 번뇌와 별빛. 오래오래 간직할 것 같다.





6길 조지훈 문학길 TIP

*조지훈 문학관 주차장에 주차하고 918번 지방도로 주실마을 입구 정류장에서 영양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영양터미널에서 하차하여 걷기를 시작한다. 또는 영양 터미널에서 07시 20분 버스를 타고 주실마을 입구에서 하차하여 200 미터 정도 걸어 조지훈문학관에서 역방향으로 걷는 것도 좋다.

*중간에 식사할 곳이 없으므로 간식이나 음료를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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