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나를 잃어버리는 길
삼층석탑에 내려앉는 아침 햇살이 참 부드럽다. 세상이 얼어붙어 마음까지 닫히게 되기도 하는 겨울을 준비하고 있는 11월. 하루를 여는 용화리는 참 고즈넉했다. 말라붙은 고춧대는 아직도 드문드문 붉은 고추를 매달고 있다. 갑자기 '잔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잔해殘骸 (명사) 부서지거나 못 쓰게 되어 남아 있는 물체.
외씨버선길 8길은 치유의 길이다. 대티골에서 시작하여 칡밭목 삼거리까지 이어지는 '아름다운 숲길. 모든 것이 가라앉아 버린 이 숲길을 나는 어떤 걸음으로 걸어야 할까. 길을 걸어 무엇을 보아야 하고, 걸음을 멈추어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사념思念의 가닥들을 거두어 어떻게 담아내야 할까. 오늘 걷는 '아름다운 숲길'은 영양터널을 뚫기 전까지는 봉화와 영양을 잇는 자동찻길이었다. 많은 사람들을 싣고 힘겹게 고개를 넘어갔을 시골 버스의 몸부림이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을까.
좁은 개울가로 이어지던 버선길은 대티골에 와서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손바닥으로도 가려질 듯한 작은 하늘. 나도 덩달아 가슴을 펴고 대티골의 좁은 하늘을 안아본다. 좁게 보여도 늘 보아왔던 하늘인데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나의 걸음이 한낱 나그네의 비틀걸음이기 때문일까.
ㅡ부부의 이름으로 문패를 달고 있는 집이 있으면 뭐 해. 사람이 없는데.
ㅡ그렇더라도 사람이 만들어 놓은 이야기는 고추밭이며, 배추밭에 남아 있잖아.
ㅡ사람들의 흔적만 따라가는 외씨버선길. 이 길에 무엇이 담겨 있을까.
ㅡ뭐든 건져 올릴 게 있겠지.
ㅡ건져 올리는 게 없어도 걷는 시간은 오롯이 빠져 들 수 있으니까.
대티골 입구에 서 있는 외씨버선길 조형물을 지나면서 끝을 보이고 있는 2025년을 돌아봤다. 한 해가 가는 시점에 내게 얻은 것은 무엇일까. 버려야 했던 일인데 아직도 마음 어디엔가 남겨진 께름칙한 잔해殘骸는 없는가.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아름다운 숲길로 뽑혔다는 길을 걸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도 되는가.
깊은 산골로 이어지는 외씨버선길을 걷겠다고 찾아온 것은 온새미로 나를 들여다보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에는 아무도 없는 외씨버선길은 정말 딱이었다. 퇴직한 지 5년을 보내는 동안 내가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점점 뒷방 늙은이가 되어가는 것을 마음으로, 몸으로 느끼고 있다. 어떻게든 버티어 보자고 행정복지센터에서 펼쳐놓은 정보화 교육에 빠지지 않고 찾아다녔고, 유튜브를 섭렵하며 세대 차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을 단순한 전화가 아닌 그야말로 스마트폰으로 이용하기 위해 내 딴에는 온 힘을 다해 부딪치고 덤벼들었다. 브런치에도 나름대로는 열심히 글을 썼다. 보아주는 분들이 많지 않아도, 많은 분들의 공감을 받지 못해도. 사고의 흐름을 가지런히 하려고 그야말로 발버둥 쳤다.
삼성노트에 김연수의 소설을 넣어 놓고 읽으며 젊은이의 방식으로 사고하려 했고, 하루에 한 번씩 AI를 열어놓고 최적의 프롬프트를 찾아보려고 애썼다. 절대 사용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PPT, 엑셀 문서를 작성하는 짓을 하며 나는 아직도 죽지 않았다고 허공을 휘저었다. 그러나 나는 늘 패배자였다.
그러나 외씨버선을 걸으면서는 나는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일주일을 걸으면서 몸에 피로가 쌓여갔지만, 그 피로감 뒤에서 마음이 쾌적해졌으며, 무엇보다 나도 모르게 쌓여 있던 삶의 잔해들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치유의 길을 걸으면서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잔해들을 어느 정도는 걷어내보려고 한다. 적어도 7길 치유의 길을 걸으면서.
숲길은 예전에 도로였던 티를 내고 있다. 임도인 듯 임도 아닌 숲길. 칡밭목 삼거리에 이르렀을 때 숲길은 기어이 옛날의 도로 이정표를 내보이고 말았다. '영양 28km' 사각 정자에 앉아 다리 쉼을 한다. 하루 정도는 이곳에 머물며 세상을 내려놓고 싶었다. 그대로 나를 잃어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온몸에 흩어져 있는 삶의 잔해를 싹싹 쓸어내고 싶었다. 일주일을 외씨버선길 위에 있으면서 상당히 털어내었기는 하지만.
이렇게 깊은 산골에서도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일까. 저기에 세워 둔 저 낡은 트럭이 세상과 이어주는 통로일 텐데. 고개를 잔뜩 젖혀야 하늘이 보이는 이 깊은 골짜기에서 저들은 무엇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짓고 있을까. 삶의 찌꺼기 같은 것은 모르고 살아갈 저들. 말간 계곡물만큼이나 훤히 들여다 보일 저들의 삶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을 즈음에 8구간의 끝을 알려주는 푯말이 길을 막았다.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막대기가 떨어지는 소리로 들릴 듯한 우련전 마을은 그야말로 신선이라도 나올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그 앞에 선 나만 세속의 찌듦을 숨길 수 없었다. 숲길을 걸으면서 많이 털어냈다고 했지만, 이렇게 고요한 마을에서 나는 부끄럽기만 했다.
그때 알았다. 오늘 걸은 길이 왜 '치유의 길'인가를. '치유'라는 것이 완치가 아니라 부분적인 치유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을.
걷기를 위한 TIP
차량을 출발지점인 일월산 자생화공원 주차장에 주차하고 우련전 영양터널까지 걸어간 다음 2차선 차도를 따라 약 4.5km를 걸어서 되돌아와야 한다. 차량 통행이 많지 않기 때문에 조심해서 걸으면 된다.
택시는 영양 택시를 이용해야 하는데 영양에서 거리가 멀어서 호출이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