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황혼은 아름답다
새벽에 일어났을 때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말은 하지 않지만 아내라고 다를 리가 없다. 생각 같으면 오늘 하루 걸음을 멈추고 쉬고 싶지만, 그럴 경우 외씨버선길 15구간을 정해진 일정에 모두 걸을 수 없다. 힘들어도 걸어야 한다.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춘양 터미널에서 6시 40분에 출발하는 서벽3리행 버스를 타기 위해 6시 35분에 숙소를 나섰다.
짐작했던 대로 봉화에서 6시에 출발한 버스는 춘양 터미널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버스에는 어제 우련전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대합실에서 만났던 아주머니 두 분이 타고 있다. 매일 첫 차를 타고 일을 하러 다니는 모양이다. 미처 잠을 털어내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두 여성분은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고 있다.
ㅡ어제 친정엄마 생일이라더니 생일상은 차려 드렸어?
ㅡ어제 가서 저녁밥 같이 먹고 엄마랑 자고 나왔어. 이제 잘 잡수시지도 못해. 속상해.
ㅡ그래도 거동은 하시잖아.
ㅡ하루 종일 마을회관에서 지내지. 오늘 동생이 회관으로 가서 동네 노인네들 모시고 생일상 차려드리기로 했어.
ㅡ좋아하시겠네.
ㅡ좋아하시지. 동네 친구분들이랑 거기에서 먹고 자고 하거든.
ㅡ마을회관에서?
ㅡ각자 이불을 다 가져다 놓았어. 하루 종일 화투 치는 게 낙이야.
ㅡ좋지. 서로 같이 지내시면 심심하지도 않고.
백두대간 수목원을 지난 버스는 서벽3리 종점에 우리 둘을 내려놓고 휑하니 돌아간다. 11월인데도 아침 기운은 싸늘했다. 서둘러 채비를 하고 도로를 따라 올라간다. 코끝을 스치는 맑은 기운이 좋다. 고갯마루에 올라설 무렵 도로를 파고 무엇인가 공사를 하고 있다. 오가는 차량을 통제하기 위한 초소도 있다.
오늘은 역방향으로 걷기로 했다. 아픈 다리를 이끌고 20km가 되는 전 구간을 걷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춘양목이라고도 불리는 금강소나무 숲길을 걷고 도심리를 지나 애당리 보건지소까지 걸은 다음 몸 상태를 보아 판단하기로 했다.
고갯마루에서 숲길로 들어섰다. 차량이 통과할 만한 길을 따라 걷는다. 좌우로 펼쳐져 있는 금강소나무 숲. 춘양목이라도 하는데 여기에서 "억지 춘양"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춘양에서 생산되는 소나무는 금강소나무로 으뜸으로 쳐주었는데 일반 소나무를 가져다가 춘양목이라고 우겼다고 해서 그렇다고 한다. 자유당 때 춘양 출신 국회의원이 이미 설계가 끝나 공사 중인 기찻길을 춘양지역으로 돌렸는데 거기에서 나왔다고도 한단다. 그래서 춘양면의 시장은 '억지 춘양시장'이다.
곧게 뻗은 금강소나무 숲길의 아침은 참 정갈하다. 솔향이 느껴지는 것 같은 것은 기분 탓일 게다. 그래도 그 느낌이 신선하고 맑았다. 우리는 길을 아껴가며 걸었다. 소나무 숲을 오래도록 즐기기 위함이었다.
춘양목 숲길 안내소 사각 정자에서 다리 쉼을 한다. 뜨거운 물도 마시고, 어제 춘양 빵집에서 사 온 국산 통밀 빵을 먹었다. "춘양 빵집"이라는 다소 촌스러운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국산 밀을 천연발효하여 만들어 인터넷에서 이름난 빵집이다. 우리는 어제 3시 정도에 갔는데 딱 하나 남은 것을 사 왔다. 맛은 어떨까? 아내는 좋아하는데 나는 아내가 좋다고 하니까 먹는 거다. 나는 달달하고 부드러운 단팥빵을 좋아한다. 빵을 사고 그 옆에 있는 하나로마트에 갔을 때 보았던 빵이 생각났다.
나이가 들면서 아내는 몸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먹는 것부터 조심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자고 한다. 그러나 나는 반대다. 고희가 된 마당에 먹고 싶은 것 먹고, 어떻게든 순간을 즐겁게 보내자는 생각이다.
어떤 의사가 갑자기 '저속 노화'를 주장한다. 60이 넘으면 흰쌀밥 먹지 말고 잡곡밥과 같은 거친 음식을 먹으라고 한다. 걷기나 달리기 하지 말고 헬스장에 가서 근육운동하라고 한다. 이렇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큰 탈이 날 것처럼 말한다. 한 때는 '해독주스'가 전부인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고기를 먹으면 금방 대장암에 걸려 죽는 것처럼 말한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외국산 농산물을 먹으라고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방송에서 떠들어댄다. 음식을 먹을 때도 채소 - 단백질 - 탄수화물 순으로 먹으라고 한다. 이 정도면 가히 신드롬이다. 엄청난 스트레스다.
은퇴하면서 스스로 다짐한 것이 있다. 스트레스를 받지 말자는 것이다. 스트레스는 언제나 외부의 영향으로 생겨난다. '저속 노화' 역시 그렇지 않을까. 인위적으로 오래 살려하지 말고, 내 마음이 편한 대로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어느 영화 평론가의 말처럼 "인생은 되는 대로 살고,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즐겁게 사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다. 세밑이 되면 지나간 세월을 되돌아보지 말고, 새해가 되어 무엇인가 계획을 세우지 말자는 것이 내 생활 방식이다.
더하지 말고 빼내는 삶을 살려고 한다. 많아서 얽히지 말고, 덜어내어서 단순하게 사는 것이다. 아이들 곁으로 이사하면서 웬만한 것은 다 버렸다. 살면서 정말 꼭 필요한 것만 지니고 살려고 한다. 장식품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무조건 버렸다. 그렇게 하고 보니 개운하고 좋다. 그렇다고 무절제한 삶을 살자는 것은 아니다. 노년의 삶은 육체보다는 정신을 먼저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밥을 먹는데 맛있게 먹으면 되는 거지 순서대로 먹어야 할까. 혈당이 급격하게 오르는 것을 막아준다고 하는데 채소 - 단백질 - 탄수화물 순으로 먹어야 한다면 김치나 나물부터 먹고, 고기나 계란, 두부 먹고, 나중에 밥만 먹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일반적인 식사에 이렇게 먹을 수가 있을까. 그게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는 걸까.
춘양목 숲길을 벗어나 사과밭을 따라 내려오면 도심 3리이다. 마을회관 앞 정자에 앉아 쉬고 있는데 내 나이 정도의 남자분이 다가왔다.
ㅡ동서 트레일을 걸으시나?
ㅡ아니고 외씨버선길요?
ㅡ아, 지난번 토요일에도 부산 사람들이 무더기로 지나갔었는데......
그래서 시작된 노년들의 넋두리.
배낭에서 초콜릿과 사탕을 꺼내 나누어 먹으며 늙은이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섞는다. 3,000 평 사과 과수월을 하는데 서울에 사는 자식 셋이 늘 도와주어서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ㅡ그래도 이놈들이 우리 도와주겠다고 주말이면 내려오고, 휴가내서 내려오고. 그 덕에 사과 농사 지어 돈 좀 만지고 살아요.
ㅡ자식들이 다 효자들이네요.
ㅡ그럼 어쩔 거야. 내가 다 돈 들여서 가르쳐 놓아서 지금 잘 먹고 잘 사는데. 아무리 부모라도 무조건 희생하는 것은 좋은 게 아니죠. 우리도 우리의 주장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요.
ㅡ맞습니다. 부모 된 도리니, 내리사랑이니 그런 말 버리고 우리의 삶을 살아야죠.
ㅡ내 말은 이래 해도 손주들 앞에서는 무조건 주머니를 열게 된다니까요.
ㅡ말해 무엇합니까. 손주들은 별천지니까.
ㅡ내 시골에 살고, 가진 게 없지만 마음은 편하게 살려고 해요. 시시콜콜 마음을 쓰면 속상해서 못 살지요. 그저 늙어서는 허허 웃으며 사는 게 최고라요.
ㅡ제 생각이 그겁니다. 그냥 되는 대로 살고, 먹고 싶은 대로 먹고. 그야말로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흔들흔들 사는 거 말입니다.
ㅡ짊어지고 걸어 다니는 걸 보면 젊은 분 같은데 벌써부터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ㅡ내가 뒤집어쓰고 있어서 그렇지 올해로 딱 7학년 이구만요.
ㅡ엥? 그렇게 안 봤는데.
ㅡ병신丙申년 생이오.
ㅡ난 을미乙未생인데.
ㅡ아이고 형님이시네. 시골에서 사시니 참 평안하고 좋으시겠어요.
ㅡ그렇기는 하지만...... 가는 복을 잘 타고났어야 할 텐데.....
ㅡ맞아요. 소풍 끝낼 때가 가까운데 그저 아름답게 가야 할 텐데요.
ㅡ그게 말이요. 마음을 편하게 가져야 하는 거요. 트집 잡고, 큰소리치고, 움켜쥐려고만 하지 말고, 그저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면서 마음을 잘 다스리면 하늘에서 조용히 데려가는 거요.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그랬다니까.
도심 3리에서 애당리 보건지소까지는 제법 넓은 들판이 이어진다. 들판을 걸으면서 나보다 한 살 많은 그분의 말을 궁굴려 본다. 스트레스를 받지 말자는 말이다. 내가 맞이할 황혼이 아름답지는 않더라도 추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스트레스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온다. 산에 다니면서, 탁구를 치면서 사람들과 부딪히는 시공간. 그곳에는 꼭 스트레스가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혼자서 놀면 어떨 때는 외롭다는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기에 적어도 스트레스는 없다. 외씨버선길을 힘들게 걸었지만 몸은 힘들었을지라도 마음은 참 편안하지 않았던가. 몸이 힘들다 보니 정신이 혼란스러울 일은 없었다.
이렇게 황혼을 맞았으면 좋겠다. 평생을 산으로 돌아다닌 선배는 산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산에서 산으로 들어갔다. 평안하지 않았을까. 아름다운 마지막이 아니었을까.
애당리 보건지소 앞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걸음을 멈추기로 한다. 춘양면까지 이어지는 춘양목솔향기길의 절반을 조금 넘어서는 거리를 걸은 셈이다. 전구간을 다 걷지 못했으면 어떻겠는가. 걸으며 생각하며 보고 느꼈으면 되지 않은가. 춘양목 솔향기를 흠뻑 들이키고, 늙은이로 살아가는 모습을 돌아보았으면 족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오늘 하루는 아름답지 않았겠는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