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분꽃

을 보았다

by 힘날세상




시내에 나갔다가 버스에서 내려 터벅터벅 걸어오다가 길가에 피어 있는 분꽃을 보았다. 봉선화와 함께 나란히 심겨 있었는데 모두 튼실하게 자라고 있다. 뜨겁게 내리쬐는 강렬한 햇볕에도 당당히 푸르른 이파리를 펼치고 봄부터 다독여온 꽃을 피우고 있었다. 가슴이 쿵쾅거린다. 반가움보다 놀라움이다. 걸음을 멈추었으나 들숨 날숨이 고르지 못하다. 몸이 하늘로 치켜 오른다. 시끄러운 소리로 오가는 자동차 소리도 모두 사라졌다. 세상은 온통 고요 속으로 젖어든다. 시골의 장독대에서 보았던 분꽃을 50여 년 만의 도시의 길가에서 보고 있는 것은 경이로움이다. 우주의 섭리이고 운명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겸연쩍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여름방학이 시작할 무렵이면 분꽃은 장독대에서 진분홍의 꽃을 피웠다. 분꽃 주변에는 봉선화, 채송화, 맨드라미 등이 곁을 틀었다. 봉선화는 시골 처녀같이 정갈한 희고 붉은 꽃을 부끄러운 듯 잎사귀 아래 숨겨놓는다. 맨드라미는 제법 키를 높이 세우고 닭 볏 같은 붉디붉은 꽃을 피워냈다. 이들은 장독대에 모여 어깨동무를 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꽃을 피웠다. 채송화는 쇠비름처럼 땅바닥을 기어 다니면서도 여러 가지 색으로 화려한 꽃을 내놓는다. 분꽃은 꽃잎이 예쁘지도 않았고, 향기가 진하지도 않았지만, 가지가 많이 뻗어 이리저리 많은 꽃이 피었다. 나팔꽃과 비슷한 모양으로 볼품없이 삐뚤빼뚤 마구잡이로 피어나는 그 촌스러운 진분홍의 분꽃이 붉은 피를 뚝뚝 흘리는 닭 볏 같은 맨드라미보다 좋았다. 꽃받침에서 기다랗게 뻗어 나온 꽃잎은 해 질 녘이 되면 나팔 모양으로 진분홍의 입술을 내밀고 세상을 끌어안았다. 밤을 밝히는 꽃이어서 꽃말이 수줍음이었을까. 아침이 되면 나팔 같은 꽃잎을 앙다물어 선비들이 사용하는 붓 모양을 하는 것은 내면을 향한 성찰일까.


어머니는 분꽃을 좋아했다. 장독대에 채송화, 맨드라미, 봉선화도 심어 놓고 지성으로 가꾸었지만, 유난히 분꽃을 예뻐했고 다독였다. 채소밭에 뿌리고 난 거름도 묻어 주었고, 가물 때에는 아침저녁으로 물도 흠뻑 주었다. 꽃이 떨어지고 달리는 검은 씨가 익을 무렵 정성스레 씨를 받았다. 그늘에서 말려 이듬해 봄에 장독대 가장자리에 뿌렸다. 그리고 남은 것은 껍질을 벗기고 빻아 그 가루를 물에 개어 얼굴에 발랐다. 어머니에게 분꽃은 보고 즐기는 것일 뿐만 아니라 몸으로 받아들여 간직하는 꽃이었다.


어머니에게서는 늘 땀 냄새가 났다.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시동생, 시누이들의 투정을 다 받아내고 새벽밥을 지어 학교에 보냈다. 온종일 들에서 농사일을 하고 흘린 땀을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저녁상을 차렸다. 어머니의 삶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머니는 옷도 없었고, 신발도 없었다. 오직 시집살이의 무게만 덕지덕지 달라붙은 무거운 어깨가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왜 그렇게 분꽃을 이뻐해?"

저녁 설거지를 하고 난 후 분꽃을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 옆에 나란히 앉았다.

"꽃이 이뿌잖여. 지멋대로 피어나지만 이파리도 많이 달리고 다른 꽃들보다 키도 훨씬 크잖여.아무렇게나 놓아두어도 잘 살기도 하고 "

"꽃이 이뿌기로는 채송화가 더 이뿐데?"

어머니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한참 동안 분꽃을 바라보았다. 나도 어머니의 땀 냄새를 맡으며 분꽃을 바라보았다.

"꽃으로 보면 채송화가 이뿌고 곱지야. 그런디 키가 자라지 못 하고, 키가 크기로는 맨드라미지만 가지가 풍성하지 않고, 봉숭아는 키도 크고 이파리가 무성하기는 하지만 꽃이 잘 보이지 안잖여. 그러나 분꽃은 다 있잖어. 키도 크고, 이파리도 무성하고, 꽃도 많이 피면서 잘 보이고."

어머니는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니들도 키도 크고, 이파리도 많고, 꽃도 많이 피는 분꽃처럼 살았으면 좋겠고만."


분꽃은 때가 되면 어디서든지 피어나지만, 분꽃을 바라보며 자식들의 풍성한 삶을 바랐던 어머니는 제대로 봉양할 틈도 주지 않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자식들에게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했지만, 허겁지겁 영안실로 찾아갔을 때 어머니는 잔잔한 미소를 보이며 눈을 감고 있었다. 어머니의 얼굴은 참 평화롭게 보였다. 장례를 치르면서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분꽃으로 피어나기를 간절히 빌었다.


길가에 심어진 분꽃은 참 다양한 색깔의 꽃을 피우고 있다. 분홍, 노랑, 하양 그리고 이들이 뒤섞인 알록이, 달록이. 이렇게 다양한 색깔로 꽃을 피우는지 몰랐다. 분꽃은 채송화에 못지않는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꽃잎이 떨어지고 난 자리에 매달려 있는 씨앗을 몇 개 받아왔다. 내년 봄에는 화분에 심어 놓고 화려하고 다양한 옷을 입고 꽃으로 피어나는 어머니와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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