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야누스적인 삶의 큐브에 갇혀 있을 뿐이다

열흘 후에도

by 힘날세상

야누스적인 삶의 큐브에 담겨 있을 뿐이다


고요를 넘어 적막이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창을 열고 환기를 핑계로 햇볕을 받아들인다. 바람이 햇볕의 꽁무니를 잡고 따라 들어왔으나 이내 흩어지고 만다. 내 몸은 이미 거뜬해졌는데도 코로나 19는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자가진단키트에 선명한 빨간색으로 한 줄이 보이는데도 나는 여전히 환자이다. 처음으로 단절이라는 말을 생각해 본다. 그렇게 열흘을 살아야 한다.


햇볕은 따스하다. 그리고 맑다. 창가에 앉아서 내 삶의 영역을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햇볕의 뒤를 따라다니며 들여다본다. 도둑처럼 스며들었고, 들어와서도 바람과 달리 요란하지 않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 같은데, 어느 순간에 이리저리 걸음을 한다. 바닥이며, 소파며, 화분을 가리지 않는다. 어디든 걸터앉고, 어느 곳이든 길게 드러눕는다.


혼자서 바라보는 햇볕은 아름답다. 작은 공간을 채우고 있을 때, 마음 깊이 스며든다. 아무런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으며, 모양도 없다. 거칠게 뛰어노는 어린아이를 만나면 똑같이 개구쟁이가 되어 쿵쾅거리고, 세월에 눌려 자울자울 졸고 있는 노파를 보듬고는 평안한 얼굴로 낮잠을 잔다. 겨우내 찬바람을 맞으며 떨고 있던 나뭇가지에 제 살갗을 비비고 쓰다듬어 담록의 이파리를 깨워 데리고 나온다. 자신을 던지고 풀어헤쳐 햇볕은 세상을 이어놓는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책을 읽을 수도 없었고,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몰려왔었다. 열이 치솟고,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다. 살갗 안쪽을 칼로 긋는 듯했다. 눈자위는 불이 붙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온몸을 망치로 두들겨 맞는 듯한 아픔이었다. 돌을 씹는 느낌으로 밥알을 씹었다. 먹어야 했기에 먹어보려고 했고, 마셔야 했기에 마셨다. 억지 춘향으로 사흘을 버텼다. 울었고, 뒹굴었고, 아파서 울었다. 혼자서 온몸을 비틀었고, 방바닥을 되는대로 기었다. 가끔은 꺼이꺼이 울었다. 혼자 있으니까 아무 생각 없이 몸을 따라 움직였다. 누가 옆에서 봤다면 실연, 아니 그보다는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울었고 뒹굴었다. 청마의 시구처럼 ‘한 번 뜬 백일이 불사신 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아라비아 사막’에 나는 던져졌다.


늦게 피어난 새잎이 먼저 핀 잎보다 더 크게 자라는 여인초旅人草 옆에 앉아 햇볕을 맞는다.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최고로 발광하던 날, 좁아진 마음의 틈으로 나는 ‘원시의 본연 한 자태’를 보았다. 사흘 밤낮을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걸터앉아 보내고 난 아침, 나는 승리의 깃발을 들었다. 확실하게 몸이 가뿐해졌다. 살았구나. ‘여호와 닛시!’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다.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으나 하늘은 파랗고 햇볕은 여전히 창을 넘어왔다. 혼자만의 세상을 그려봤다. 어떤 옷을 입고 있을까. 꽃밭의 독백이라도 들려줄까.


일주일째 문이 닫힌 아파트는 철옹성의 큐브이다. 누구도 틈입할 수 없는 완벽한 혼자만의 공간. 완전한 자유. 살아있는 즐거움.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무인도. 나의 시간이었다. 나의 세상이었다. 옷을 다 벗어버렸다. 세속을 훌러덩 벗어던져버렸다. 새옹지마라는 말을 잠깐 생각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온몸에 흘러내리는 따뜻한 기운이 마냥 좋다. 아내가 끓여 놓고 간 육개장을 한 그릇 퍼서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부드럽고, 고소했다. 사람은 언제나 간사하다. 고통을 벗어나면 금방 잊어버리는 게 사람이다. 그랬다.


낮잠을 잤다. 발가벗은 채로 침낭에 들어가 달콤한 낮잠을 잤다. 온몸을 감싸는 침낭은 아늑했다. 발가벗고 자는 즐거움. 고등학교 때 읽었던 카프카의 『변신』을 생각했다.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아니다. 나는 고독하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았다. 밤을 새워 소설을 읽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읽을수록 느낌이 깊어지는 소설이다.


“조국에서 해방되고, 신부들에게서 해방되고, 돈에서 해방되었지요. 말하자면 나는 걸러진 거예요. 나는 가벼워졌어요. 말하자면 나 자신을 해방해 비로소 진정한 인간이 된 겁니다.”


움켜쥔 것을 놓아버렸을 때, 비로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인간이 된다고 했다. 나는 이 철옹성의 큐브에서 나갔을 때, 과연 탐욕을 버릴 수 있을까. 지금의 순수함을 다 내던질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며 움켜쥘 것이 틀림없다. 강한 집착이다. 나는 걸러지지 못했고, 무거워진 것이다. 해방이 아니다. 나는 카잔차키스가 말하는 오롯한 자유를 얻지 못할 것이다. 나 자신을 해방해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소설은 느슨해진 나를 옥죄었다. 벌거벗었고, 그래서 해방감을 누리던 나에게 두꺼운 옷을 입히고, 그러고도 모자라 굴레를 씌웠다. 갑자기 나의 큐브는 검은빛으로 둘러싸였다. 차곡차곡 쌓여가던 편안함이 짓눌리기 시작했다. 여느 때 같았으면 고개를 끄덕이며 조르바의, 바질의 이야기를 되새김질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구속에서, 집착에서 벗어난 자유의 가치를 가다듬어야 한다. 그런데도 나는 억압을 당하고 있다. 코로나 19의 터널을 완전히 빠져나가지 못한 탓일까.


넷플릭스, 웨이브, 등을 돌아다니며 마구잡이로 영화를 보았다. 라면을 끓여 냄비째 들고 먹으며 보았다. 통속적이고 머릿속이 복잡해지지 않는 것만 찾아다니며 즐기고 놀았다. 시원하게 터지는 액션을 보았고, 코미디를 보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스스로 글빚에 몰려가며 블로그에 석 달 넘게 매일매일 쓰고 있는 글을 읽었다. 작정한 대로 100일 동안 100편의 글을 쓰고 나면 나는 자유로워질까. 목숨을 던져 임무를 완수한 후 작은 섬에서 한가한 휴가를 즐기던 톰 쿠르즈의 느긋함을 나도 맛볼 수 있을까.


코로나 19에 짓밟히고 있을 때는 병마에서 풀려나기만 하면 해방이라고 생각했다. 온전한 자유를 누릴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 사흘 동안 사선을 넘나들다가 이레 동안 내 세상을 얻었다고 큰소리쳤는데 소설 한 편에 와르르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육신의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늘 무거운 것에 짓눌리고 있는 마음을 구해내지 못한다. 우리 앞에 언제나 완전한 것은 없는 걸까.


소설가 ‘이상’은 수필 『권태』에서 해답을 보여준다. 도시 생활에서 찌든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시골로 갔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미건조한 시간뿐이다. 눈앞에 펼쳐진 초록색 자연, 도대체 감정이 없는 농민들, 절대 짖지 않는 개들, 계속되는 소의 되새김질, 돌과 풀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 모든 것이 일상적인 관습으로 둘러싸인 채 변화가 없다. 이상은 이러한 농촌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확인한 것은 몸에 밴 관습처럼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무의미한 일상일 뿐이다. 도시에서보다 더한 고통에 빠지게 된다.

나가고 싶다. 스스로 천국이라고 생각했던 큐브에서 나가고 싶다. 쥐고 있어도 쥐고 있지 않은 듯하고, 차곡차곡 쌓아놓은 즐거움도 단 한 방에 무너져버리는 것이 세상이다. 한 곳에만 안주할 필요는 없다. 부딪쳤다고 울고, 뿌리쳤다고 웃는 것이 삶이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창문을 다 열어 놓는다. 뒤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수목원의 나무들은 푸릇푸릇한 잎을 피우고 있고, 나는 여전히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적인 삶의 튜브에 갇혀 있을 뿐이다.


햇볕을 따라 바람이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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