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멋진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
채아는 광장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새치름히 앉아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내가 늦게 마중을 나간 탓이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토라져 앉아 있는 모습도 그저 예쁘기만 하다. 그래도 아이의 기분을 풀어주어야 한다. 나 때문에 마음이 상했고, 나로 인해서 토라져 있는 거고 보면 결자해지가 아니던가. 내가 조금 더 서둘러야 했다. 착수를 못하고 있는 이창호 국수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을 것이 아니었다. 학교가 끝나고 피아노 학원에서 제 친구들과 신나게 건반을 두드렸겠지. 그때는 신났겠지. 그러면 지금은? 밥 먹고 돌아서면 배고플 나이가 아닌가. 아이의 마음을 먼저 헤아렸다면 나는 이창호 국수의 다음 한 수를 기다릴 것이 아니었다.
이제 아홉 살 초등학교 2학년이지만, 우리 같은 늙은 세대가 생각하는 어린이가 아니다. 요즘의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나 수단은 상당 부분에서 우리 같은 늙은이들을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순발력이 뛰어나고, 디지털 방식의 사고력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나는 늙었고, 사고방식은 내다 버려도 아무도 주워가지 않을 만큼 참으로 낡아버린 것이다.
"채아야, 할아버지가 조금 늦게 나왔지? 미안해. 엘리베이터가 늑장을 부려서 그런 거야."
나는 아내가 챙겨준 쑥떡을 꺼내 놓는다.
"할아버지, 그러니까 그런 상황을 예측하고 더 일찍 나왔어야죠."
채아가 입을 뾰로통하니 내밀며 언짢은 느낌을 뭉텅뭉텅 얹어서 쏘아댄다. 기분이 좋다. 이 아이의 입에서 이런 수준의 언어가 튀어나온다는 것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채아 기분이 많이 상했겠구나. 어쩌지? 이거 할머니가 아침에 만들어 준 거야. 얼른 먹고 학원에 가자."
조금 겸연쩍은 얼굴로 바라보며 등을 다독인다.
"괜찮아요. 할아버지가 매일매일 저를 위해 마중 나오시고, 또 영어 놀이터에도 데려다주시잖아요. 저는 그게 고마워요."
쑥떡을 입에 넣으며 예의 밝은 표정을 짓는다. 영악하다고 할까. 대단하다고 할까.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60여 년 전 내가 이 아이만 했을 때에는 절대로 이런 수준의 사고를 하거나, 언어를 구사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 우리가 받아 들었던 세상은 참 단순했고, 그래서 지금 같이 경쟁적이지는 않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보따리는 마루에 내던지고 들판으로 나가 놀았다. 아무 죄도 없는 개구리에게 돌이나 던지고, 오징어 게임이나 깡통 놀이, 자치기나 하며 노는 것이 전부였다. 눈으로 귀로 받아들이는 것은 모두 느릿느릿했고, 모두 같이 어우러지는 것이었다. 깊이 사고할 것도 없고, 그냥 흥이 나는 대로 즐기면 그만이었다. 초등학교 들어가서야 ‘영희야 놀자.’, ‘철수야 놀자.’를 읽고 쓰며 한글을 배웠다. 산수 공책에 1,2,3 ---- 9,0을 괴발개발 쓰면서 숫자를 익히기 시작했다. 읽을 책이 없어 참 지독한 독서 갈증을 느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머릿속에 잠재해 있는 사고방식을 버리지 않고는 오늘날의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출 수 없다. 아이들의 사고의 깊이는 상상을 못 할 정도다. 세상이 그런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배우는 수학은 내가 생각하는 접근 방식과 완전히 다르다. 국어책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어휘들이 실려 있다.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제시하여 글을 쓰라고 요구하고 있다. 37년 동안 국어를 가르쳐 온 교사로서 살펴봐도 수용하기 어려운 내용들이다. 서점에 널려 있는 독해력 교재를 보고는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지털식 사고와 AI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 아이들 앞에서 노인들은 어떻게 서야 할까. 백설공주나 신데렐라 같은 케케묵은 이야기로는 아이들 옆에 설 수가 없다. 번개처럼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는 캐릭터들을 무슨 수로 다 기억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소리 높여 불렀던 동요는 세상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고, 그 자리는 아이돌의 현란한 동작과 알아들울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른 멜로디가 차지해 버렸다. 눈을 감았다 뜨면 총기가 떨어지는 노인들은 감당할 수가 없을 정도로 세상은 변하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재미없다. 자기들 수준을 맞춰주지 못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있으면 늘 심심하다. 아무리 알려줘도 자기들이 좋아하는 포켓몬 캐릭터를 구분하지 못하는 할아버지, 그리스 ・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이름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할머니가 어찌 재미가 있겠는가.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16부작으로 방영되는 드라마는 어려워서 이해도 안 되고, 등장인물의 대사도 알아듣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자꾸 막장으로 흘러가는 일일드라마나 주말드라마 정도나 그나마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이다. 복잡 구성을 보이는 현대소설을 가르쳤지만, 요즘 영화나 드라마는 서사구조가 복잡하여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어느 유행가처럼 늙는다는 것은 익어가는 것만은 아니다. 솔직히 밀려나는 것이다.
손주들과 놀고 싶은가? 그렇다면 어떻게든 멋진 할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아이들이 읽으려고 사다 놓은 책도 다 읽어봐야 하고,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의 캐릭터도 기억해 두어야 한다. 손주들이 하는 말을 잘 들어줘야 하고,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손주들과 공유할 수 있는 생각을 해야 하고, 손주들이 넓혀가는 영역 안에 포함되어 있으려고 애를 써야 한다.
일곱 살짜리 손자 녀석은 체스를 제법 잘한다. 체스는 장기와 달리 게임하는 룰이 복잡하다. 그래서 규칙이나 운영 기술에 관한 용어도 많다. 오랫동안 몸으로 익혀 온 것이 아니라서 들어도 금방 잊어버린다. 처음에는 내가 이기는 경우가 훨씬 많았는데 몇 달이 지나자 판판이 진다. 그러자 내 앞에서는 체스판을 내놓지 않는다. 밀려난 것이다. 제 엄마, 아빠의 차를 탈 때는 장난치고 시시덕거리고 까부는데, 내 차를 타면 잔소리가 많아진다. '횡단보도에서는 멈추세요.', '신호등을 잘 지키세요.', '천천히 운전하세요.' 할아버지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멋진 할아버지가 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정말 발버둥 쳐야 한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처럼 열과 성을 다해야 한다. 키오스크를 이용하여 햄버거를 주문할 수 있어야 하고, 요즘 대세라는 ‘그래비트랙스’도 독창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손주들의 관심사를 미리 파악해서 그 방면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아두어야 한다. 생각해 보면 노인들이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은 세상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적적하거나 우울할 틈이 없게 만드는 아주 자극적이고 흥미 있는 삶의 한 방편인 것이다.
누구나 멋진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춰 주고 싶다. 그러나 누구나 다 멋진 할아버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노년의 삶은 힘들다.